방백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강연을 들었을 때

호르텐시아 2010. 2. 3. 03:27
자정 무렵 날씨가 도로 매섭게 돌아섰다. 밤을 흐리는 뭇 사람들의 한숨도 깨끗이 얼어붙어 하늘도 간만에 검고 맑았다. 청명한 어둠 속 허공을 딛고 날듯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천랑성에서 시작해 성근 대기에 발을 담그고 비스듬히 누운 오리온을 거쳐, 리겔과 알데바란을 지나 카펠라에 이르면 언제나 고개를 한껏 젖힌 채 발을 땅에 대고 선 내가 있었다. 자줏빛 가지 혹은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서 뱅글 돌아 떠오르던 별들, 별을 잇는 육각형의 그물, 네가 살아 있는 동안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몇 안 되는 클리셰. 클리셰이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다. 열여섯의 밤과 열아홉의 밤과 다시 스물여섯의 밤이 실수로라도 조각나 흩어지지 않고 한 사람으로서 무리 없이 엮일 수 있도록, 이어주는 것이다.

이어폰이 말했다. I don't do sadness. not even a little bit, just don't need it in my life. 마주본다는 건 언제나 어렵다. 더 이상 충분히 어리지 않은데도. 중얼거렸다. 똑똑히 봐. 우린 더러워지기 위해 살아가. 더러워진다는 것은 잊혀지는 것이고 지우는 것이며 또한 올곧게 견딘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더러워지는 이유는 필연적으로 죽어 없어져야 할 무언가가 죽었기 때문이다. 혹은 죽였기 때문이다. 한때 반짝이던 죽은 것의 잔해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거듭 거듭 이해하기 위하여. 당신의 무수히 아름다운 조각을 모아 이 행성 북쪽에 띄우고 그 빛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언젠가 오늘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면 그땐, 달리 또 무슨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