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

일 이야기

호르텐시아 2010. 3. 26. 22:50

- 3월이 되자 모든 게 놀랍도록 작년처럼 돌아갔다. 다리는 바빠서 잊고 있는 동안 깨끗이 나아버렸고, 겨우내 올라왔던 여드름도 싹 사라져 보들한 피부로 돌아갔다. 하루에 역 하나 거리를 서너 번씩 다녀도 배고픈 줄 몰랐다. 연구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놀지 않고 일만 했다. 일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기계적인 정확성과 유기체적인 효율성이 정신/육체 양측을 지배하고 있다. 스스로가 완전에 가까운 통제 하에 움직인다는 감각은 대단한 만족감을 준다.



- BK보고서 기간이다. 가끔 불평하긴 하지만 행정일 자체는 꽤 좋아하는 편이다. 증빙을 모으고 잔액을 확인하고 비목 사용을 결정하고 서류에서 요구하는 세부항목을 기입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무엇보다 서면으로 제출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확실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이 맘에 든다. 의외로 적성에 맞을지도 몰라. 관官에 들어가 하루종일 서류작성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는 건 오버일까 역시.

서류 중 질적 문서 작성 부분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한 보기 좋게 실적을 상술해야 하는데, 가장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라 맘에 든다. 어떻게 하면 보다 적확한 표현을 써서 세련되게 쓸 수 있을까. 흠.  2학기 장학금을 따낼지 말지 여부가 내 손에 달려 있는 거야(라고 멋대로 생각하는 후유소요).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지만.



- 그리하여, 지금 지속적으로 돌리고 있는 사항들은

두 개의 수업과 네 편의 논문
매주 한 편의 논문과 랩미팅 준비
학회 여비 처리 및 피험자비 관련
BK 보고서 작성
연구 학부생 실습 및 교육시키기
실험 프로그램 손보기
피험자 볼러다 실험
주말의 개인적 책모임
그외 기타 독서
토플 준비
종시 준비

다. 행정, 연구, 수업. 다들 매주 돌아가는 사이클이 다르다. 세 편의 논문을 완독하고 괜찮은 토론을 하려면 일요일 저녁부터 준비해야 한다. 랩미팅 들어가기 이틀 전에는 해당 논문을 읽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BK 보고서 작성은 4월 중순까지다. 종시는 4월 초에 본다. 학부 연구생은 매주 화요일에 오므로 그 전 주중에 필요한 사항을 알려줘야 한다. 주말의 책모임을 위해서는 수요일부터 해당 책을 손에 잡아야 한다. 카드 결제일이 매달 27일이므로 적어도 다음 달 두 주 전까지는 산학에 서류가 들어가야 한다.

그 틈틈이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개인적 여가는 돌아가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조금씩 넣어둔다. 하지만 가끔은 후배를 만나 밥을 먹고 동기의 결혼식에도 가야 한다. 약속도 잡는다. 갑자기 호출이 오면 수습하러 뛰어가기 위한 예비시간도 챙겨 둔다. 우연히 2008년 싸이 다이어리를 봤는데 거기에 자랑스럽게 하루의 일과가 적혀 있었고- 음. 그 시절의 나는 이렇게 단순한 걸 가지고 좋아했단 말인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즐거운 생활의 핵심은 타임매니징 스킬에 달려 있단 사실을 절감한다. 아직까지는 학교 다이어리와 기억력으로 커버 가능한데, 점점 좀더 좋은 스케줄러가 아쉬워진다. 일의 퀄리티에 따라 4분화해 처리하고도 싶고, 시간대별로 세분하고도 싶고, 저마다 다른 타임사이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싶은데 지금은 다이어리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무리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어떠려나. 이름대로 쓸만하려나.


-지도선생님의 연구실적을 정리하다 보면 그러한 타임매니징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해외학회 위원 겸 현재의 직위를 유지하면서 여섯 건이 넘는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동시에 부족한 대학원생들을 돌보고, 학회를 준비하며, 해외저널에 낼 퀄리티의 논문을 쓰고, 여러 곳에서 하는 초청강연도 나가셔야 한다. 플러스 개인적인 사생활과 육아도 있다. 그런데도 스트레스에 눌린다는 인상이 거의 없으시다. 그건 정말로,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 능력이다. 쉽게 감탄하지 않는 성격인데 저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  

언제나 문제는 실력이다. 기회가 닥쳐오면 받아들일 수 있는 capacity가 있어야 한다. 직위나 일에 눌려버리지 않고,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나도 더욱 분발해야겠다.  


- 요즘은 마음이 내내 차분하다. 2월 말에 그토록 안절부절못했던 게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졌다. 내 속 어딘가, 한계와 에너지를 가늠하는 잣대를 정확하게 손에 틀어쥐고 있는 기분이다. 아는 분께서 운이 좋다는 건 자기자신을 올바로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라 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두렵지 않다. 머리가 맑다.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니, 올해 도약하지 않으면 안된다. 2008년에 걸었듯이 2010년에도 승부를 걸어야 한다. 지금을 위해 작년 내내 몸을 단련해 왔을지도 모른다. 적게 자고 오래 집중할 수 없다면 아무리 에너지를 내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니, 무엇보다, 잘. 정확하게 가늠해 한번에 찔러넣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