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유

호르텐시아 2006. 2. 14. 03:25
"쾌락의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배움에서 얻어지는 흥분 역시 맛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면
결코 배우기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재작년 9월에 싸이에 적었던 짤막한 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증명 방식이겠다. 그 외에 '나는 보살핀다' 혹은 '나는 지배한다' , '나는 창조한다'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은 그렇게 '소유하고, 보살피고, 지배하고, 창조해 나가는' 일련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증명하고, 삶의 의미를 구한다.

내 경우에는 그것이 '앎' 이다. 알아 나가는 과정이 곧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을 알고, 사람들의 성품을 알고, 목소리를 알고, 노래를 알고, 글을 알고, 지식을 알아 나가면서 나는 형체 없고 무의미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공부할 만한 뭔가에 집중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은 (실상) 귀찮고 성가시지만, 그렇게 뭔가를 읽고 쓰고 생각하고 습득하고 있으면- 정말로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든다. 아, 살아 있구나. 여기 이렇게. 조용하고도 강력한 기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흔들어 놓아,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배우기를 멈춘 자신은 숨쉬고 있어도 정말로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언제나 느끼고 있다.

그런 내게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관심은 호기심으로 드러난다. 호감도 혐오도 상대에 대한 끊임없는 궁금증의 일부로 작용한다. 상대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은 내 사랑의 표현이다.  놀람도, 슬픔도, 진실인지 아닌지 불안한 감정의 표현도 '왜?' 라는 질문으로 수렴한다. 왜, 라고 물음으로써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의 절반은 결국 당신을 향한 진심의 모습이니까. 놀랐어요, 슬퍼요, 두려워요, 라는 무언의 메시지니까. 그래서 내가 던진 질문에 상대가 당황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면, 미안함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쓸쓸해진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말은 너와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거부 같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초조해지고 만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왜 '꿈꾼다' 라든지 '파괴한다' 가 아닌 건가요, 라고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하나 알 수 있는 건- 느끼고 받아들이고 알아가기를 멈추면 지금 이 삶의 의미는 사라져버린다는 것. 평소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숨쉬며 살아간다 해도, 호흡이 기실 얼마만한 가치를 갖는지 우리가 알듯-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 그렇게 내게 무엇이 절실한지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삶을 위한 대답은 무엇인가요. 왜 살아갈 수 있나요. 무엇을 통해 살아 있을 수 있나요. 이렇게 또다시 묻고 있는 그런 자신을, 너무 싫어하지는 말아 주세요. 상처입지도 말아 주세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