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멈춰서서 들여다보기

호르텐시아 2006. 2. 21. 02:23
[ ...진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체성의 독특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또 비길 데 없는 성질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실하지 못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성을 사회적으로 구성된 추상적 관념에 넘겨주면서 '세인'의 익명성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는 방식에서 특히 중요하다. 사실 죽는 것은 항상 하나의 개별적이며 고독한 개인이다. 그러나 사회는 각각의 죽음을, 그것의 공포를 완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일반적인 범주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유족과 또 그 자신들도 죽을 운명인 사람들을 위로한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뭐,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야 하니까" 라고 말한다. 이 '우리 모두(we all)'는 세인의 정확한 번역이다. 그것은 모두이면서 아무도 아니다. 우리 자신을 그 일반성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혼자서 고독하게 죽을 것이라는 필연적인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숨긴다.

...[중략]... 이 '현실'이 실로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름, 주소, 아내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모든 계획은 결국 소멸된다. 모든 집은 결국 텅 비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모두, 우리의 행동 모두가 지닌 고통스러운 우유성(偶有性)에 대항하지 않고서 우리가 일평생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이 모른 이름과 모든 정체성을 빼앗기는 저 악몽의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불성실하게도 우리는 피난처로 줄달음친다. ...]



나는 내가 고독하게 죽을 것임을 때때로 실감한다. 가끔 밤이 늦었을 때 모든 목적 있는 행동을 그만두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볼 때가 있다. 창 밖에는 천변에 늘어선 가로등과 달리는 자동차의 붉은 빛이 선연하다.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굴러가는 세계. 그리고 나는 그 세계의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서서 검은 창에 비치는 스스로의 얼굴을 응시한다. 소망과 욕망과 꿈의 틈새에 존재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그 의문에 집착하는 한- 사회가 구축하고 우리가 사회에게 요구하는 삶을, 감옥과 감옥을 재창조하는 수인으로서 살 수 없을 것임을 안다. 가면을 쓴 채 역할놀이를 하는 배우로서의 삶은 회의적이고, 비밀스러우며, 행복하지 않다.

라디오헤드가 노래하고 폴 오스터가 쓰는 인간의 삶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나약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비애와 모든 절망과 나약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쿤데라가 말하는 삶은 가볍고, 니체가 말하는 삶은 무겁다. 나는 쿤데라를 읽은 적도 (한 번 있었지만 어떠한 느낌도 받지 못했었다) 없고, 니체를 공부한 적도 없어 어느 쪽이든 둘다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니터 너머에서 내게 쿤데라와 니체와 운명애(amor fati)를 설명하며, 자신의 삶에 관해 (아마도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들려주는 후배가 있다. '비판이란 건 좀더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한 건 아닐까, 생각해요.' 지금의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한 위안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것을 선택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고독하게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조금이나마 내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똑바로 바라보기'를 선택한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어 기쁘다. 그 사이에 수많은 자기기만과 사회화된 장치들이 있을지라도, 조금쯤은 우리의 실존이 서로 연결될 수 있기를, 혹은 연결되었기를 빈다. 나는 수많은 가면 너머에 존재하는 당신들을 보고 싶다. 당신과 소통하고 싶다. 진실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