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경의 구조로 바라본 보색 대비의 원리
신기한 테스트라고 이름붙여진 것들 중에 간혹 보색대비를 응용한 것이 있습니다.
가령 빨간색 새가 있고 옆에 백지가 있는데, 빨간색 새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옆의 백지로 눈을 돌리면 문득 초록색 새가 떠올라 보이는 식이지요.
우리 눈이 감지한 색은 분명히 빨간색인데, 왜 보지도 않은 초록색이 떠올라 보이는 걸까요?
그것은 시신경이 색을 감지하는 원리와 구조를 통해 어느 정도 해명이 가능합니다.
1. 망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망막에서 빛을 감지하는 세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흑백의 밝기를 감지하는 간상세포와 색을 감지하는 원추세포가 그것입니다. 원추세포는 다양한 빛의 파장을 받아들여 전기 신호로 바꾸어 전달하는 수용기 역할을 합니다.
참고로 빛의 파장이 400나노미터 이하로 짧으면 파랑, 500나노미터 정도면 초록, 600나노미터 정도면 노랑에서 주황, 700나노미터 정도는 빨강이 됩니다. 가령 파장이 560나노미터라고 하면 황록색에 가까운 색깔이 나오겠죠.
원추세포의 종류는 적색용, 청색용, 녹색용 3가지밖에 없습니다. 빛의 3원색이 적색, 청색, 녹색과 같은 맥락입니다. 인체의 기관 역시 효율성을 무시할 순 없기에, 이 세 종류의 원추세포가 감지하는 빛의 파장을 조합해 어떤 색이든 감지 가능하므로 그렇게 진화한 것입니다. 굳이 노랑이나 보라 등 다른 색을 감지하는 원추세포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거죠.
( 두 가지 색의 파장이 합쳐져 단일 스펙트럼처럼 여겨지는 경우를 일컬어 이성체(metamer)라고 합니다. 가령 빨간빛+파란빛=보라빛이 나오는 경우와 그냥 단일 보라빛의 색이 우연히 일치하는 경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세 종류의 원추세포는 담당하는 색의 영역에 속한 빛의 파장을 감지하며, 원추세포에 들어온 파장정보가 후두엽의 선조피질(긴 띠 모양의 뇌세포모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에 있는 색 감지 영역(얼룩모양이라 일명 blob으로 불리지요)에 전달되어 하나로 통합되어, 우리는 색을 감지하게 됩니다.
2. 중간지점을 거쳐 뇌로 향하다
망막상에 한해서는 원추세포가 빛을 감지하는 수용기 역할을 하구요. 이제 수용기가 받아들인 데이터를 조합하여 '색깔' 이라고 느끼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새끼손가락 굵기의 시신경 다발을 타고 전달되는 빛의 정보가 LGN(외측 슬상핵) 이라는 부위를 거쳐 후두엽(즉 머리통의 뒤쪽)까지 전달됩니다. LGN에서는 불필요한 정보를 제거하고 필요한 정보를 분류해 적당한 뇌의 부위에 접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색은 총 6층으로 되어 있는 LGN의 3,4,5,6 층에 접속합니다. 일명 파보(parvo, 라틴어로 small)층이라고 불리는 층인데, 여기서는 색이나 위치 등의 정보를 모아 뇌로 보냅니다.
이렇게 모아진 색의 정보는 최초의 처리기관인 선조피질에 접속합니다.
여기서 아까 말한 색 감지 영역-일명 얼룩-에 있는 두 종류의 대립세포가 색을 감지하여 구별하는 역할을 합니다. 대립세포는 빨강-초록, 노랑-파랑이 있습니다.
3. 보색대비의 원리
보색대비의 원리는 이 대립세포 때문입니다. 색별로 나뉜 대립세포는 또한 성질에 따라 각각 1종과 2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단 1종에 해당하는 빨강-초록 대립 세포를 예로 듭시다. 빨강 띠에 가운데 빈 구멍이 녹색인 두 종류의 도넛을 상상해 보세요. 첫번째 종류는 빨강이 자극받으면 가운데 녹색이 억압되고, 가운데 녹색이 자극받으면 주위의 빨강이 억제됩니다. 둘 중 한 가지 색을 보는 동안은 그것의 보색을 감지하는 부분의 발화율*이 상대적으로 억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극을 주는 색(빨강이라고 합시다)을 치우면 그 자극이 사라짐과 동시에 억제가 풀리고, 그와 반대되는 보색(녹색)을 감지하던 세포의 반응비율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즉, 눈앞에 녹색(빨강)이 없는데도 그것을 느끼는 세포는 알아서 반응해 버리는 것입니다.
한편 아까 빨강(녹색)을 보고 자극받았던 세포는 피로해져서 감지 능력이 평균치 이하로 떨어집니다. 즉 순간적으로 빨강감지 부분은 반응 비율이 떨어지고 녹색 감지 부분은 반응 비율이 올라가는 현상을 보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는데 본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자극받는다는 점이 핵심!!)
이렇게 일어나는 반응의 차이 떄문에 우리 뇌에서는 보색의 잔상을 체험하는 것이죠. 노랑-파랑 대립 세포 역시 동일한 메커니즘을 따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반면 또 하나의 다른 종류는 자극 대 억제 기제가 아니라, 보색 모두가 반응합니다. 초록 잎들 사이의 빨간 과일이 유독 강조되어 보이는 게 그 떄문이죠. 초록 잎이나 빨강 과일 어느 하나만 눈에 띄는 게 아니라요. 두번째 종류의 대립세포가 생겨난 이유는 보색대비로 인해 먹이 찾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와, 과일나무 사이의 다른 포식자를 더 쉽게 감지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습니다.
(*발화율: 우리 뇌의 신경 세포- 즉 뉴런들은 자극이 있건 없건 일정한 비율로 반응하여 신호를 보냅니다. 이 반응 비율을 발화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억압과 자극 모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기제입니다. 자극이 강해지면 그 비율 이상으로 반응하고, 자극이 사라지고 억제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발화율이 평균 수치 이상으로 떨어집니다. 만일 평상시에 아예 반응하지 않는다면 억제 반응 자체가 불가능하겠죠? 이것은 우리 뇌가 감지하는 영역이 한층 줄어들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년 9월 내공사냥에 미쳐 있을 때 지식인에 올렸던 유일한 오픈사전. 1학기에 들었던 수업 내용이 2학기까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니, 기쁜 일이지만 지금은 다 까먹어버렸다. 써놔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