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象
2006. 5. 1, 아침
호르텐시아
2006. 5. 1. 10:09
일찍 일어났다. 아주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는 건 드문 일이다. 요정이 실수로 눈꺼풀을 건드리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간다. 창 밖의 공기에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세탁기 뚜껑을 열고 갓 빤 옷을 꺼내 코에 댈 때처럼, 차갑고 신선하다. 하늘은 짙은 안개의 빛깔을 띠고 있다. 젖어 있지 않은 분자들로 구성된 바다. 안테나가 돛대처럼 뒤집힌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몇십 미터 아래의 지상에서는 연둣빛 새순들이 바람에 불온하게 흔들릴 것이다.
가슴은 이제 아프지 않다. 대신 기분 좋은 욕망이 그 자리를 채운다. 심장에서 따뜻한 피가 뿜어나와 온 몸을 데우는 듯한 아침은 그리 흔치 않다. 욕망에 이끌리어 글을 쓰기로 한다. 가장 살아 있는 것 같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거리를 걸을 때면 늘 하는 버릇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한다. 미간에 잡힌 주름을 보고, 눈매나 턱에 숨어 있을 성품을 상상한다. 걸어서 다다를 목적지는 어디일지, 얇은 얼굴 가죽 아래 석벽처럼 존재할 인생의 형태는 무엇일지 상상한다. 열 명이 동시에 스쳐지나간다면 공상은 순간 쪼개져 열 개가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누거품처럼 빠르게 스러진다.
늘 누군가를 지켜보아 온 덕분일지 모른다. 마음이 평정을 유지할 때, 대개의 경우라면, 눈앞의 사람이 내게 바라는 게 뭔지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욕구에 순응한다. 자정에 맞추어 생일 축하를 해 준다. 두 개씩 나누고 남은 껌을 상대의 몫으로 건넨다. 너는 평범하지 않으며 오히려 독특하다고 말해 준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밤 늦게까지 엠에센을 통해 이야기를 듣고서는, 피곤한 몸으로 지쳐 누운다. 끊임없이 사람들은 뭔가 바란다. 타인이 바라는 일을 행하는 것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한 친구는 어떤 오욕에도 견딜 수 있는 저항성을 가졌다. 그녀는 그것을 나르시즘이라 불렀다. 나는 저항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저항력이 좋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관점과 견해가 있다. 그중 나는 나를 쫓아낸 사람들, 배척하고 싫어할 사람들의 관점을 골랐다. 나는 그들이 내게 바라는 대로 행동했다. 조용히 입을 닫거나, 오로지 사실에 근거한 정황만을 이야기했다. 자기변명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글루를 켜놓았던 것은 좋지 않았다. 그 당시 몇 가지 '자기변명'이 새어나왔다고 어떤 이는 주장했다). 순순히 탈퇴 명령에 응했다. 시끄럽게 만든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란 취약한 동시에 강력하다. 그것은 때때로 개인이 지녔다고 믿게 되는 힘이지만 실상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는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룰을 어긴 자는 추방된다.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거기에 따랐다. 그리고 이제 각자의 개별적인 삶만이 남았다.
다른 셋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적어도 할 수 있는 것, 손에 쥐어진 만큼을 힘껏 했다. 나는 멍청히 앉아서 자판을 두드렸다. 방에 숨어 내게 명령을 언도할 타인의 견해와 감정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내게도 바람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남아 있을 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이 안된다면 적어도 누가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했는지, 누가 뭘 느꼈는지, 왜 갈등했는지,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적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는 네 명 모두가 욕구와 감정을 가지고 옳다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이해는 용서의 동음이의어가 결코 아니다.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는 인간을 인간답게 이해하기를 바랐다.
단 한 명이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매우 늦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조금 더 일찍 허락되었다면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도 나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욕망에 따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관점은 제각기 다르다. 그저 어긋난 연애사에서부터 공동체의 안녕을 깨뜨린 중죄까지. 단지 리비도의 관점에서라면, 내재한 도덕률은 비참하다. 지나칠 정도의 인내력은 오히려 불리하다. 때로 잘못은 잘못 이상으로 인간을 짓밟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판단하는 쪽이나, 판단을 받는 쪽이나.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말했듯, 모두가 같은 사실을 보고 저마다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나는 단체를 사랑하고, 단체 속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을 아낀다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은 고통받지 않아도 좋았다. 눈앞의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며 결국 상처입혔다. 그들은 고통받았다. 고통의 양이 얼마나 되든 나는 그것에 책임이 있었다. 캐롤 길리건은 이 룰을, morality of care라고 불렀다. 필기를 계속하며, 나는 마음 속의 짐에 이름을 붙여 준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12월의 주목과 4월의 목련만큼이나 다르다.
바위에 비끄러매여 있는 사람은 등 뒤의 바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일이 인생에서 얼마만큼의 크기로 자리잡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밀라가 아니다. 그녀는 무수히 욕망하고, 부수고 좌절을 겪은 후 그녀가 감각하는 얼음과 눈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남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덴마크의 시민이 아닌 그린란드의 사냥꾼으로 태어났다. 나는 그녀처럼 용감하지 않다. 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욕망은 가능한 한 날카롭게 갈아 눈에 보이는 위치에 놓아둘 것이다.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욕망은 알아서 제 길을 찾아갈 것이다. 가끔은 타인의 피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때 옳다고 믿었던 자신만의 엉터리 도덕률에 따르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가슴은 이제 아프지 않다. 대신 기분 좋은 욕망이 그 자리를 채운다. 심장에서 따뜻한 피가 뿜어나와 온 몸을 데우는 듯한 아침은 그리 흔치 않다. 욕망에 이끌리어 글을 쓰기로 한다. 가장 살아 있는 것 같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거리를 걸을 때면 늘 하는 버릇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한다. 미간에 잡힌 주름을 보고, 눈매나 턱에 숨어 있을 성품을 상상한다. 걸어서 다다를 목적지는 어디일지, 얇은 얼굴 가죽 아래 석벽처럼 존재할 인생의 형태는 무엇일지 상상한다. 열 명이 동시에 스쳐지나간다면 공상은 순간 쪼개져 열 개가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누거품처럼 빠르게 스러진다.
늘 누군가를 지켜보아 온 덕분일지 모른다. 마음이 평정을 유지할 때, 대개의 경우라면, 눈앞의 사람이 내게 바라는 게 뭔지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욕구에 순응한다. 자정에 맞추어 생일 축하를 해 준다. 두 개씩 나누고 남은 껌을 상대의 몫으로 건넨다. 너는 평범하지 않으며 오히려 독특하다고 말해 준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밤 늦게까지 엠에센을 통해 이야기를 듣고서는, 피곤한 몸으로 지쳐 누운다. 끊임없이 사람들은 뭔가 바란다. 타인이 바라는 일을 행하는 것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한 친구는 어떤 오욕에도 견딜 수 있는 저항성을 가졌다. 그녀는 그것을 나르시즘이라 불렀다. 나는 저항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저항력이 좋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관점과 견해가 있다. 그중 나는 나를 쫓아낸 사람들, 배척하고 싫어할 사람들의 관점을 골랐다. 나는 그들이 내게 바라는 대로 행동했다. 조용히 입을 닫거나, 오로지 사실에 근거한 정황만을 이야기했다. 자기변명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글루를 켜놓았던 것은 좋지 않았다. 그 당시 몇 가지 '자기변명'이 새어나왔다고 어떤 이는 주장했다). 순순히 탈퇴 명령에 응했다. 시끄럽게 만든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란 취약한 동시에 강력하다. 그것은 때때로 개인이 지녔다고 믿게 되는 힘이지만 실상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는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룰을 어긴 자는 추방된다.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거기에 따랐다. 그리고 이제 각자의 개별적인 삶만이 남았다.
다른 셋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적어도 할 수 있는 것, 손에 쥐어진 만큼을 힘껏 했다. 나는 멍청히 앉아서 자판을 두드렸다. 방에 숨어 내게 명령을 언도할 타인의 견해와 감정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내게도 바람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남아 있을 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이 안된다면 적어도 누가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했는지, 누가 뭘 느꼈는지, 왜 갈등했는지,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적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는 네 명 모두가 욕구와 감정을 가지고 옳다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이해는 용서의 동음이의어가 결코 아니다.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는 인간을 인간답게 이해하기를 바랐다.
단 한 명이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매우 늦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조금 더 일찍 허락되었다면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도 나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욕망에 따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관점은 제각기 다르다. 그저 어긋난 연애사에서부터 공동체의 안녕을 깨뜨린 중죄까지. 단지 리비도의 관점에서라면, 내재한 도덕률은 비참하다. 지나칠 정도의 인내력은 오히려 불리하다. 때로 잘못은 잘못 이상으로 인간을 짓밟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판단하는 쪽이나, 판단을 받는 쪽이나.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말했듯, 모두가 같은 사실을 보고 저마다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나는 단체를 사랑하고, 단체 속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을 아낀다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은 고통받지 않아도 좋았다. 눈앞의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며 결국 상처입혔다. 그들은 고통받았다. 고통의 양이 얼마나 되든 나는 그것에 책임이 있었다. 캐롤 길리건은 이 룰을, morality of care라고 불렀다. 필기를 계속하며, 나는 마음 속의 짐에 이름을 붙여 준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12월의 주목과 4월의 목련만큼이나 다르다.
바위에 비끄러매여 있는 사람은 등 뒤의 바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일이 인생에서 얼마만큼의 크기로 자리잡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밀라가 아니다. 그녀는 무수히 욕망하고, 부수고 좌절을 겪은 후 그녀가 감각하는 얼음과 눈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남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덴마크의 시민이 아닌 그린란드의 사냥꾼으로 태어났다. 나는 그녀처럼 용감하지 않다. 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욕망은 가능한 한 날카롭게 갈아 눈에 보이는 위치에 놓아둘 것이다.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욕망은 알아서 제 길을 찾아갈 것이다. 가끔은 타인의 피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때 옳다고 믿었던 자신만의 엉터리 도덕률에 따르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