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象

커피

호르텐시아 2006. 5. 8. 01:50
<나는 문간에 서서 수리공이 커피를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엌은 전체적으로 흰색이었다. 그는 되도록이면 움직일 필요가 없도록 배드민턴 선수들이 코트에서 자리를 잡듯이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작은 전기 분쇄기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옅은 색의 커피콩을 많이 갈다가 그 다음에는 작고 거의 까만색에 유리처럼 빛나는 커피콩을 약간 갈았다. 그는 두 종류의 콩을 작은 금속 깔때기에 넣고는 에스프레소 기계에 부착해서 가스 버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린란드 사람들은 나쁜 커피 습관을 익혔다. 나는 뜨거운 우유를 네스카페 인스턴트 커피에 바로 부어 마신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에 커피가루를 바로 개는 일도 있다.
수리공은 손잡이가 달린 기다란 유리잔 두 개에다가 휘핑크림과 우유를 1:2 비율로 채웠다.
기계에서 따라낸 커피는 원유처럼 진하고 검었다. 그는 증기 노즐로 우유에 거품을 낸 다음 커피를 양쪽 잔에다 따랐다.
우리는 잔을 가지고 소파로 갔다. 나는 누군가 내게 좋은 것을 제공해주는 순간에 감사해한다. 기다란 유리잔 속에 든 음료는 참나무처럼 짙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의 향수를 뿌린 듯한 열대의 냄새를 풍겼다.
"당신을 따라갔어요."
수리공이 말했다.
잔은 타는 듯이 뜨거웠다. 커피는 끓는 듯했다. 보통 뜨거운 음료는 잔에다 부으면 식어버린다. 하지만 증기 노즐로 저었기에 잔은 우유와 함께 100도로 데워졌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들어갔죠. 당신이 거기 어,어둠 속에 앉아서 기,기다릴 줄 몰랐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잔 테두리에 입을 갖다댔다. 커피는 너무 진해서 눈에서 눈물이 났고 갑자기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도시 I, 127-128페이지


새순이 살랑이는 늦봄의 밤은 에스프레소 원액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커피는 겨울의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마시기 위한 음료다. 12월에서 4월로 넘어가면서 밤하늘은 차갑고 단단한 에나멜의 흑색에서 투명한 청색으로 탈바꿈한다. 지구의 불빛이 주름진 끝자락에 아련한 홍조를 새기면- 보랏빛의 허공에는 반쯤 푸르스름하게 물든 구름이 젖소 무늬처럼 달라붙어 있다. 맑고, 따사롭다.

커피는 본디 진하게 쓰고 향기로워야 커피답다고 생각한다. 액에 설탕을 타면 되려 향을 감한다. 엷게 마시는 것도 좋지만 역시 짙은 게 제맛이다. 생기발랄함과 가벼움이 미덕인 계절엔 생과일 주스라든가 그런 게 차라리 더 어울릴지 모른다.

친밀한 누군가와 함께, 커피콩을 갈아 원액을 뽑고 우유와 휘핑크림을 얹어 마시고 싶은 것은 커피라기보다- 매서운 추위와, 그 추위를 상쇄시킬 만큼 충분히 뜨겁고 따스한 무엇일지 모른다. 혹은 그저 그날 그날 살이의 바닥에 깔아두고 싶은 기품일지 모른다. 좀더 달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