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생각에 고요히 귀기울이면

호르텐시아 2006. 11. 25. 15:21
문득 생각이 나서 통계를 열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누군가 이 이글루를 샅샅이 훑어보는 걸 알 수 있다. 사백 개에 달하는 글의 절반 이상을 읽으며, 보이지 않는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조차 두려워 차마 돌아보지 못하는 좁고 깊은 굴 같은 생각의 편린을.

보일 듯하면서 보이지 않는 투명한 시선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도망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적나라하게 솔직하지도, 완전히 감추지도 못한 채 그 불확실함을 온몸으로 견디어 내며 여기까지 왔다. 시선이 싫다면 이글루를 옮길 수도 있었다. 지난 포스팅을 누군가 읽길 바라지 않는다면 계속 비공개로 놔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기를 선택했다. 무모하게 자신을, 냉정하면서도 가늠할 수 없는 현실 앞에 들이밀었다. 똑바로 보면서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난 여름, 이제사 돌아보며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했었다고 회상하는 여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던 잿빛 당시에도 하나만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도피처나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내가 불확실함에 맞서려 노력하는 한, 무의미한 부딪침을 반복하는 한, 두려움도 갈등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페스팅거라는 사회심리학자가 내놓은 인지부조화 이론이란 게 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두 관점이 상충할 때, 사람은 어떻게든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두 관점 중 더 영향력이 크고, 더 일관된 방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인간은 불확실함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종교의 교리, 이념과 사상,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불가해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더 큰 정체성에, 가치관에, 참조집단에 기대면 정신적으로 편안해진다.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에 입학한 이래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 왔다. 그건 의지를 바탕으로 한 선택이었다. 옳아 보이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모두가 대답할 때 침묵을 지켰다. 나쁘게 말하면 회색분자에 가깝겠다.

그래서일까. 나는 동아리나 과 티셔츠 외에, 고대를 표방하는 물품을 사 본 적이 없다. 교과서에도 학교 이름 같은 건 쓴 적이 없다. 여기서도 별다르지 않다. 같이 온 사람들이 펜 스튜던트임을 한껏 느끼면서 와튼 파일을 들고 다니고, 로고가 찍힌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한다. 이제 돌아가면 나는 다시 무엇일지를.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은, 그저 현재의 내가 덧쓰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기에. 아무리 남들이 부러워해도, 그것이 온전히 내게 속한 것이 아님을 어쩌겠는가. 슬프지만 어쩌겠는가. 돌아가면 사라지는 정체성 따위에, 마냥 기댈 수야 없지 않은가.


현재 느끼는 고통은 순전히 과거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고질적인 버릇의 영향력이 더 클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때로 비참하기까지 한 인간의 이중성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데 뒤섞여 울컥, 마음의 어둠 밑바닥에서부터 해일처럼 솟구쳐 올라올 때마다, 번번이 자신이 연약한 살덩이로 만들어진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알 수 없음은, 정의할 수 없음은 고통스럽다.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다만 불확실함 그 자체는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나약한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한 이후 글보다도 눈앞의 현실에 부대끼려 애썼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면전에 글을 적는 걸 두려워하면서. 이토록 슬픈 생각이 밤새 괴로움을 먹이 삼아 자신을 갉아먹도록 놔두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김연수의 에세이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해답 없는 수많은 질문에 답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가치관이며 정체성이 생겨난다. 그러한 과정을 몇 번이고 겪어 가며 사람은 자란다.'

이런 나 역시, 자라고 있는지. 내가 마침내 찾아낼 해답은 과연 어떤 형태일지. 옛 시절의 사람이 그랬듯 때로 눈물을 멈추고 다만, 슬픈 생각에 조용히 귀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