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象
불과 3년 전에 썼던 글 토막들
호르텐시아
2007. 2. 2. 18:45
[명료하게 글을 잘 쓰는 것. '반짝임'이라는 하나의 단어 속에는 비오는 날의 아스팔트와 모래 속에 섞인 석영, 이슬에 비친 햇살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제대로 글을 써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기 바라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 시간이 갈수록 글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
[내 눈앞에 놓인 현실은 더럽고 잔인하며 유혹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세상에 살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원한다면 사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딜레탕트, 악을 실천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는 사람, 이른바 현실주의자, 이상주의자, 코뮤니스트, 소시민.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든 버티어 나가야만 한다. 이게 지금의 나이다. 20년 후 나는 악을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 실망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흔히 생각하는 순수함의 기준에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리고 위에 내가 서술한 사실은, 그 사람들이 알았든 몰랐든 나의 내부에 늘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보이지 않는 부분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어쨌든,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행동한다. 피차 마찬가지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 진짜 두려움을 맛보지 못한 시절엔 아무 말이나 입에 담을 수 있다.
[현실이 비참하든 비참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 앞에 가로놓인 어떤 것을 바꿀 수 없고,
그것이 고통스럽다면 목놓아 울고,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그것이 즐겁다면 있는 힘껏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살아남고 싶다.]
- 알았든 몰랐든,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기본 중추는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솔직함의 뜻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와 '감춘 것이 없다'의 혼의混意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나 귀로 들었을 때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 한번 느껴보라. 얼마나 많은 의미가 제멋대로 사용되는지.
[왜 열렬한 사랑의 뒤끝에는 관계가 부서져 버리는 것일까.
그동안 그토록 상대를 알고 느끼고 바라보길 원하지 않았나.
얹은 무게가 지나쳐, 감당하지 못해 끊어지는 것이라면
관계는 마치 가는 실과 닮았다.
사람을 만나 쉽게 좋아하지만,
그 감정이 사랑으로 크려는 것을 일부러 꺼리는 것도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을
공감하게 된 사람을
취향과 취미가 같은 사람을
믿음을 준 사람을
함께 대화하면 마음이 더워지는 사람을
애틋한 느낌이 드는 사람을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잃어야 한다는 게
슬프기 떄문이다.]
- 충분히 슬픈 일이다.
[떄로 난 정말 정성들여 길게 편지를 썼는데
답장은 달랑 짧은 한 줄일 때도 있고
매일 반에 찾아가서 안부를 묻는데도
영 반응이 시큰둥해서 우울하게 만들 떄도 있고
문자 보내다가 갑자기 답이 뚝 끊겨서
섭섭한 기분으로 천장만 쳐다볼 때도 있고
나보단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즐거워 보여서
혼자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도 있고
툭 내던진 말에 상처받을 떄도 있고
열심히 준비한 선물에 기뻐 보이지 않아서 얄미울 때도 있고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사람이 사람끼리 어울려 살다 보면 많은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웠다
상대가 뜻 없이, 이유 없이 휙 그은 상처에 무작정 아파하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찬찬히 살펴보는 방법을 배웠다
마음보다도 머리의 판단이 한몫을 했다
그리고 시간을 두어 다시 다가서고
이렇게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문득 그녀가 내게, 내가 그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음을
아주 불현듯 깨닫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
짧고 간단한 말이지만 담긴 건 큰 의미
다름을 넘어서 함께 갈 수 있다는 것도 역시 큰 의미]
- 고등학교 때의 소박하고 귀여운 발상.
[아,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 모든 빛나는 멋진 순간을 기술할 수 있을까! 엷은 색의 따스한 조명 아래, 식탁 위에 팔을 얹고 서로를 바라보며 나누던 이야기, 대화에 열중하는 손짓, 오가는 말과 말 사이에서 파도 거품처럼 솟아오르는 재치 혹은 미소. 순간은 불티처럼 잠시 반짝 빛을 내고 스러져 간다. 그리고 뒤에 남겨진 우리는 불완전한 추억을 손에 쥔 채 지나가 버린 찰나를 영원히 아쉬워한다.]
- 문체가 번역 소설 같지만 술술 잘 읽힌다.
[그만 실언을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게 글이라면 흔적이 되어 남는다. 그렇다면 그 글을 지우고 사과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사과만 하고 그냥 남겨두는 게 좋을까.
첫번째를 골랐다면 그 일이 상대방에게 두고두고 가시나 상처가 되어 남을까 두려워서이고, 두번째를 골랐다면 상대의 아픈 기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여 더 큰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이다. 둘 다 두려움에서 기인했다면, 상대를 생각하는 진정한 배려는 어느 쪽일까.]
- 이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문제.
[기호를 통한 사고의 전달은 부작용도 함께 가져왔다. 어떤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관습적으로 굳어진 의미를 공유한다. 때때로 한 사람이 의도한 바가 그 관습적 의미와 다를 때, 이해할 수도 없고 전달될 수조차 없는 뿌리깊은 오해가 생겨난다. 의미는 제멋대로 달리는 바퀴의자에 묶여 있는 사람처럼 위태롭다.]
[객관적이 된다고 하여 냉정해지지 않으며, 주관적이 된다고 하여 포용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객관적으로 대한다고 할 떄, 사람들은 흔히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냉혹한 무언가를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상대를 가장 강하게 상처입히는 것은 극도로 주관에 치우칠 때이다. 모든 편견, 배타주의, 억압과 차별이 눈먼 주관의 한켠에 자리한다. 객관적 바라봄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이다. 나의 감정과 좋고 싫음을 떠나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다. 진정한 이해가 움직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 과거의 생각들이 현재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여기 토막글들은 좋은 예시.
[섹스만큼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도 없다. 합일을 위해 우리는 옷을 벗고 알몸이 된다. 외부의 공격에 가장 다치기 쉬운 상태로 자진해 들어서는 것이다. 정신은 그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고, 그 결과 (우리가 인식하든 하지 않든) 자체로서도 상대를 향해 활짝 열리게 된다. 아마 여기에 대해 다양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왜 남자들이 잠자리에서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왜 성폭행이 크나큰 정신적 상처를 남기는가? 오르가즘조차도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향한 감정과 공감하고 있다는 상상에서 촉발된다.]
성인블로그에 성인이 쓴걸 누가 뭐래 -ㅂ- 다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가 불분명한 문장이 좀 있군.
이렇게 예전에 써놓은 글들을 읽다 보면, 대체 나이를 먹어 나아진 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나이를 먹으면서 얻었다고 생각한 경험은 단지 감수성을 무디게 한 것 뿐일까? 이젠 문장 하나를 적는데도 그때와는 달라서 몇 번이고 더듬거려야만 한다.
- 시간이 갈수록 글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
[내 눈앞에 놓인 현실은 더럽고 잔인하며 유혹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세상에 살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원한다면 사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딜레탕트, 악을 실천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는 사람, 이른바 현실주의자, 이상주의자, 코뮤니스트, 소시민.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든 버티어 나가야만 한다. 이게 지금의 나이다. 20년 후 나는 악을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 실망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흔히 생각하는 순수함의 기준에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리고 위에 내가 서술한 사실은, 그 사람들이 알았든 몰랐든 나의 내부에 늘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보이지 않는 부분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어쨌든,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행동한다. 피차 마찬가지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 진짜 두려움을 맛보지 못한 시절엔 아무 말이나 입에 담을 수 있다.
[현실이 비참하든 비참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 앞에 가로놓인 어떤 것을 바꿀 수 없고,
그것이 고통스럽다면 목놓아 울고,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그것이 즐겁다면 있는 힘껏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살아남고 싶다.]
- 알았든 몰랐든,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기본 중추는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솔직함의 뜻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와 '감춘 것이 없다'의 혼의混意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나 귀로 들었을 때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 한번 느껴보라. 얼마나 많은 의미가 제멋대로 사용되는지.
[왜 열렬한 사랑의 뒤끝에는 관계가 부서져 버리는 것일까.
그동안 그토록 상대를 알고 느끼고 바라보길 원하지 않았나.
얹은 무게가 지나쳐, 감당하지 못해 끊어지는 것이라면
관계는 마치 가는 실과 닮았다.
사람을 만나 쉽게 좋아하지만,
그 감정이 사랑으로 크려는 것을 일부러 꺼리는 것도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을
공감하게 된 사람을
취향과 취미가 같은 사람을
믿음을 준 사람을
함께 대화하면 마음이 더워지는 사람을
애틋한 느낌이 드는 사람을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잃어야 한다는 게
슬프기 떄문이다.]
- 충분히 슬픈 일이다.
[떄로 난 정말 정성들여 길게 편지를 썼는데
답장은 달랑 짧은 한 줄일 때도 있고
매일 반에 찾아가서 안부를 묻는데도
영 반응이 시큰둥해서 우울하게 만들 떄도 있고
문자 보내다가 갑자기 답이 뚝 끊겨서
섭섭한 기분으로 천장만 쳐다볼 때도 있고
나보단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즐거워 보여서
혼자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도 있고
툭 내던진 말에 상처받을 떄도 있고
열심히 준비한 선물에 기뻐 보이지 않아서 얄미울 때도 있고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사람이 사람끼리 어울려 살다 보면 많은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웠다
상대가 뜻 없이, 이유 없이 휙 그은 상처에 무작정 아파하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찬찬히 살펴보는 방법을 배웠다
마음보다도 머리의 판단이 한몫을 했다
그리고 시간을 두어 다시 다가서고
이렇게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문득 그녀가 내게, 내가 그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음을
아주 불현듯 깨닫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
짧고 간단한 말이지만 담긴 건 큰 의미
다름을 넘어서 함께 갈 수 있다는 것도 역시 큰 의미]
- 고등학교 때의 소박하고 귀여운 발상.
[아,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 모든 빛나는 멋진 순간을 기술할 수 있을까! 엷은 색의 따스한 조명 아래, 식탁 위에 팔을 얹고 서로를 바라보며 나누던 이야기, 대화에 열중하는 손짓, 오가는 말과 말 사이에서 파도 거품처럼 솟아오르는 재치 혹은 미소. 순간은 불티처럼 잠시 반짝 빛을 내고 스러져 간다. 그리고 뒤에 남겨진 우리는 불완전한 추억을 손에 쥔 채 지나가 버린 찰나를 영원히 아쉬워한다.]
- 문체가 번역 소설 같지만 술술 잘 읽힌다.
[그만 실언을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게 글이라면 흔적이 되어 남는다. 그렇다면 그 글을 지우고 사과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사과만 하고 그냥 남겨두는 게 좋을까.
첫번째를 골랐다면 그 일이 상대방에게 두고두고 가시나 상처가 되어 남을까 두려워서이고, 두번째를 골랐다면 상대의 아픈 기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여 더 큰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이다. 둘 다 두려움에서 기인했다면, 상대를 생각하는 진정한 배려는 어느 쪽일까.]
- 이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문제.
[기호를 통한 사고의 전달은 부작용도 함께 가져왔다. 어떤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관습적으로 굳어진 의미를 공유한다. 때때로 한 사람이 의도한 바가 그 관습적 의미와 다를 때, 이해할 수도 없고 전달될 수조차 없는 뿌리깊은 오해가 생겨난다. 의미는 제멋대로 달리는 바퀴의자에 묶여 있는 사람처럼 위태롭다.]
[객관적이 된다고 하여 냉정해지지 않으며, 주관적이 된다고 하여 포용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객관적으로 대한다고 할 떄, 사람들은 흔히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냉혹한 무언가를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상대를 가장 강하게 상처입히는 것은 극도로 주관에 치우칠 때이다. 모든 편견, 배타주의, 억압과 차별이 눈먼 주관의 한켠에 자리한다. 객관적 바라봄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이다. 나의 감정과 좋고 싫음을 떠나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다. 진정한 이해가 움직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 과거의 생각들이 현재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여기 토막글들은 좋은 예시.
[섹스만큼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도 없다. 합일을 위해 우리는 옷을 벗고 알몸이 된다. 외부의 공격에 가장 다치기 쉬운 상태로 자진해 들어서는 것이다. 정신은 그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고, 그 결과 (우리가 인식하든 하지 않든) 자체로서도 상대를 향해 활짝 열리게 된다. 아마 여기에 대해 다양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왜 남자들이 잠자리에서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왜 성폭행이 크나큰 정신적 상처를 남기는가? 오르가즘조차도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향한 감정과 공감하고 있다는 상상에서 촉발된다.]
성인블로그에 성인이 쓴걸 누가 뭐래 -ㅂ- 다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가 불분명한 문장이 좀 있군.
[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상주의적 면모가-밖에서 보기에 단지 인격에 매어달린 장식고리 정도로 비칠 때까지, 나는 현실에 대한 벽-저항 혹은 적응-을 쌓아올리길 멈추지 않으려 한다.]
- 꾸준한 현재진행형 앞에 나름 만족스럽다.
[고통으로 인해 자신을 잃고 연약해지거나
혹은 더 거칠고 무디어지거나
아니면 보다 나은 방향으로 성숙하거나
여러 가지 결과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흔적은 평생을 두고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간혹 어두운 밤이면 상처에 대한 기억은 틀림없이 돌아와 우리를 시험할 것이다. 매그놀리아에서처럼, ''우리는 과거를 잊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무서운 흡인력으로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고 예전의 방식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 두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도록, 과거에 한때 아팠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수긍할 수 있다면 성공한 것이다. 상처를 갖고도 훌륭히, 떄로는 기쁨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준비가 된 것이다.]
- 고통의 산을 힘겹게 넘기가 무섭게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역시, 당시엔 몰랐었다.이렇게 예전에 써놓은 글들을 읽다 보면, 대체 나이를 먹어 나아진 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나이를 먹으면서 얻었다고 생각한 경험은 단지 감수성을 무디게 한 것 뿐일까? 이젠 문장 하나를 적는데도 그때와는 달라서 몇 번이고 더듬거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