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象

표현에 대한 결심

호르텐시아 2007. 3. 29. 12:44
지금까지는 오감으로 감지 가능한 대상을 가능한 한 즉물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대상의 속성을 면밀히 검토하여 속성에 걸맞는 형용사를 씀으로써 대상을 언어화된 세계로 끌어올 수 있으며, 그렇게 끌어온 대상을 타자에게 똑같이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정면승부에서 언어는 즉물을 이길 수 없다. 떠가는 구름과 활짝 핀 수선화의 감촉과 아이스크림의 맛은, 체성감각을 통한 경험 그 자체이다. 형용사가 늘어나고 또 늘어난다 해서 즉물이 주는 모든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언어는 경험일 수 없으며 단지 경험을 촉발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체감각을 통한 모든 인간의 경험이 동일할 수 없기에 즉물에 무한히 근접한 절대적 표현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글쓰는 이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감각한 경험의 가상적 대변일 뿐이다.

그렇다면 온전히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다루는 것만이 언어를 다루는 가장 완전한 방법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픽션은 감정이입을 전제한다. 주인공의 퍼스낼리티, 주인공의 대사, 자라난 배경과 그 혹은 그녀를 지배하는 상황에 독자가 감정이입할 때 비로소 픽션은 읽는 이에게 권위를 발휘한다. 감정이입은 언제 일어나는가? 언어를 통해 개인의 은밀한 경험이 촉발될 때이다. 픽션에 제시된 낱말 혹은 문장이 아주 오래된 기억, 의미있는 감정을 자극할 때 독자는 자기자신을 언어를 통해 표현된 상황 혹은 주인공의 위치에 대입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어떻게 제각기 다른 경험에 대한 기억을 하나의 낱말 혹은 문장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아직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 다만 즉물에 있는 그대로 '맞서는' 것이 언어를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 언어는 단지 암시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좋은 암시를 위해서는 단어 고유의 의미에 가급적 철저하되 지나치게 많은 수식어는 도리어 경험의 촉발을 저해하므로 지양할 것, 정도를 떠올렸을 뿐이다.



즉물에 집착하기보다 그저 언어가 주는 정서 자체에 도취되어 있었을 때 만들었던 표현이 훨씬 독창적이라고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