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t Penn

공부에 대한 근황

호르텐시아 2007. 4. 5. 04:48
- 일본어 수업 프레젠테이션 점수가 나왔다. 50점 만점에 50.
센세, 근데 솔직히 이건 아니에요.

그날 난 한국어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하듯 대강의 스크립트만 짜서 애드립으로 진행을 했다. 물론 당연히 망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도, 애초에 내가 지닌 lexicon의 수준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Whorfian view에 입각한 색채언어의 변용 같은 걸 올바르게 설명하고 전달하려면 그에 걸맞는 수준의 단어와 문장 구사가 필요하잖아. 평소 make, get, keep, take 따위의 단어에 전치사만 그때그때 바꿔가며 쓰는 수준의 영어 가지고는 영어 화자들이 뭔 소린지 제대로 알아먹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튼 후반부는 그래서 숭숭 구멍이 났고,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선생님은 내가 설명한 개념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했다고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 구린 영어회화실력이었을 뿐이다. 혼도 센세는 친절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상냥하게 말해주지 말아요. 젠장. 내 눈에도 뻔히 보인단 말야. 난 저 점수를 받을 자격이 없어. 까놓고 말해 내가 그날 내 프레젠테이션에 점수를 매겼다면 50점 만점에 32점 줬을 거다. 평소엔 자신이 만족할 만큼 하면 다른 것도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인데 그게 역전된 기분 따위, 낯설고 찝찝하고 하여튼 별로 안 좋다.

하지만 마음 속의 또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점수가 안좋았음 사실 더 우울했을 거지? -_-

...응 OTL 사실 그래...

제길. 나도 결국 학점 앞에선 별수 없구나.
가서 따져서 32점 달라고 말할 수 없는 내 자신이 갑자기 두 배로 우울해졌다. ㄱ-
내가 뭐 그렇지 뭐...ㄱ-


- 문제의 영문과 밋텀 페이퍼를 다시 고침받아왔다. 교수가 그러시더라. "곳곳에 좋은 아이디어가 많은데, 다만 그걸 하나로 묶을 키워드가 부족하네. 중심 주제가 없어." 그렇다. 내가 좀 그렇다. 모든 걸 한번에 다 담고 싶어한다. 사진 찍을 때도,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주는 감각들을 전부 담고 싶어서 안달한다. 그게 잘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다. 글의 틀도 뷰파인더도 담았을 때 보기 좋을 적정 한계가 있으니.

지금까지 읽고 감상한 작품들- 맨 처음의 blow-up을 제외한 쥴 & 짐,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가장 위험한 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이번의 아마데우스까지, 어느 하나 즐겁고 기쁘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나는 좋은 작품들로 채울 수 있었던 어린 날의 시간을 그냥 그렇게 보냈구나. 그때 쫄지 말고 용감하게 뛰어들어 더 많이, 닥치는 대로 읽어보는 건데. 어릴 적에 읽었던 책들은 그냥 잊혀지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 뇌의 가장 활발한 영역을 차지하고 싱싱하게 꿈틀거린다. 문학 작품 같은 건 지금도 순간순간 구절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다. 내가 좀더 성실했다면 지금 그 영역을 더 넓게 확장시켰을 텐데. 보다 질이 좋은 리소스로 더 많이 채웠을 텐데. 안타깝고, 자꾸 안타깝다. 아직 젊고 돈보다도 시간이 많을 때 가능한 한 많이 느끼고 많이 흡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감상하고 질문지를 대하면 자꾸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아나고, 수업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듣고 내 아이디어와 비교하면서 또 풍성해지고, 그걸 전부 한데 담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기 힘들다. 이글루에도 몇 번이나 쓰려고 했는데, 워낙 잡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포스팅이 밀린다. 아무래도 다른 블로그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지 싶다. 이래저래 자꾸 아쉬운 뒷맛을 남기는 영문과 수업이다.

재밌는 건 작품들 내 남녀관계가 전부 삼각이다.-ㅂ-;; 쥴 & 짐의 쥴-케이트-짐, 초콜릿의 페드로-티타-닥터 브라운, 가장 위험한 해의 빌리-질-가이, 그리고 테레사-토마스-사비나 (여기에 프란츠가 추가되지만 그건 결국 서브 에피소드일 뿐이므로)까지. 앞의 셋은 여자 하나에 남자 둘, 마지막은 남자 하나에 여자 둘. 선생님... 삼각을 좋아하셨구나-_;;
개인 취향이 아니라도, 긴장감을 조성하기는 삼각관계만한 구도가 없지 싶다. 둘이면 보여줄 수 있는 관계가 어차피 하나뿐이고, 넷이면 관계망이 지나치게 다양화되어 포커스를 맞추기 힘들다.


- 미술.





빛은 후방과 전방에 모두 있다. 저 마네킹의 무릎이 절묘하게 작열하는 백라이트를 가렸다. 본래 빛을 잘 못 다뤄서, 빛이 미묘하게 퍼지는 이런 구도 한번 그려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