談
엽편- 그리고 나와 왈츠를 <외전>
호르텐시아
2007. 4. 7. 15:48
<그리고 나와 왈츠를>
삼경이었다. 전야戰野는 고요하지 않았다. 전쟁을 준비하는 지상의 무수한 불빛으로 하늘은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다. 화톳불이 널름거릴 때마다 오가는 병사들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투박하고 살기 어린 소음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녀는 두텁게 깔린 자줏빛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공기는 여전히 건조했다. 내일은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함지불을 등지고 선 그녀의 그림자에 또다른 그림자가 겹쳐왔다. 실루엣은 짙었고, 강건했으며 키가 큰 남자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뭐죠."
"그만 막사로 돌아가시지요."
"난 여기가 좋아요."
"곧 전투가 시작됩니다."
"내가 피 냄새를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나요?"
"숙녀의 안전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그제서야 그녀는 몸을 돌려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랜 린넨 겉옷 틈새에 닳아빠진 가죽끈을 두른 칼자루가 삐죽이 솟아 있었다. 사내의 귓불에 걸린 둥그런 귀걸이가 불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번득였다.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렸다. "이방에서 온 무녀란 제법 용감하군요." 그녀는 야만인을 향해 가벼운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내 일이에요."
유목민 무사는 가는 갈색 눈으로 소녀를 찬찬히 훑었다. 불길을 정면으로 두고 서서도, 오만한 두 눈동자는 여전히 칠흑처럼 검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땅에서 나고 자란 자는 누구나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눈을 두려워한다.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내린 그들은 대대로 신의 의지를 받드는 검은 눈의 딸들을 낳아 왔다. 더 크고 강대한 적에게 맞서기 위해, 눈앞의 여자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시해 왔던 두 민족간 신의의 증표로서 그날 저녁 이곳에 도착했다. 그녀를 모시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검을 다룰 줄 압니까?"
"아뇨."
"활은 쏠 줄 압니까?"
"나는 무녀에요."
"대체 뭘로 전장에서 자기 몸을 지킬 겁니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힘으로!" 소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이 춘다던 그 춤으로 말입니까? 한식경 안에 양팔이 잘려나가도 모릅니다."
"그럼 내 사람들이 나를 이곳에 보낼 이유가 없었겠죠."
"흐음." 그의 눈초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힘을 지닌 자들 중 한 명이 그의 눈앞에 있다. 적이 아닌, 우군이자 손님으로서. 남자는 순수한 호기심, 그중 절반쯤은 건방진 태도에 제법 예쁘장한 얼굴을 한 여자를 대하는 호기심으로 무녀를 보았다. 불빛에 비친 여자의 이마는 하얗고 매끈해 티 한 점조차 없었다.
"춤이라면 저도 출 줄 압니다만."
옥처럼 냉랭하던 소녀의 얼굴에 기막히다는 빛이 스쳤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 문득 입을 오므렸다. 사내는 그 입술에서 야만인, 이라는 단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야만인이라, 남자는 생각했다. 건방지다고 해야 할지, 철이 없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는 그저 차분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자는 몸을 구부려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검은 능직의 겉옷이 흘러내려 손끝을 가렸다.
"이 돌멩이 같은 거예요.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움직여 줄 때 비로소 움직일 수 있죠."
"누가 누구를."
"내가 모시는 이를 위해 나는 움직이죠."
사내의 표정에 당혹한 빛이 어렸다. 즉물적인 인간, 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훤칠하고 날렵한 육신에 깃든 정신은 단순하다. 예리한 눈매가 보는 것은 전방의 사냥감이고 성벽이며 적이다. 길고 뼈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이 린넨 옷자락을 문득 건드렸다, 멈추었다. 그녀는 손에 쥔 돌멩이를 던지듯 내려놓은 채 몸을 반쯤 돌렸다.
"그럼 난 제례의식을 준비해야겠어요." 사내는 그 말에 문득 평정을 찾아, 농답게 가벼운 한 마디를 던졌다.
"춤은 함께 추지 않을 겁니까?"
이곳에 도착한 이래 두번째로 여자는 웃었다. "절대로!" 그녀는 곧 덧붙였다. "타인이 끼어들 여지 따윈 없어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일러주십시오."
"그러죠.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검은 옷깃이 일렁이며 멀어져 갔다. 불티가 어지러이 날려 그 뒷모습을 비추었다. 남자는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다 몸을 돌려 거대한 괴물처럼 어둠을 등진 아세라트의 성벽을 응시했다. 곧 여명이 다가올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