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象

소통과 부수적인 이야기들

호르텐시아 2007. 7. 1. 02:03


1.

미국에서는 대화를 위해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들과 '대화'하기에는 내가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다. 어휘가. 맥락이. 표현이. 언제나 긴장했다. 3인칭 단수의 S를 발음하지 않는다든지 할 때마다 혼자 소스라쳤다. 자기자신에게 신경쓰느라 눈 앞의 사람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걸어 돌아다니는 상자처럼 등록금을 내고 발언을 하고 클레임을 넣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면, 가슴이 돌처럼 차가웠다.

한국에 돌아와서 친구 아닌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꽉 닫혀 버렸는지 실감했다.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웃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다. 식사는 맛있었지만 위장이 자루처럼 쪼그라들어 버렸다. 카페에 가서 음료를 반쯤 비운 후에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분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한 손의 손가락을 꼽았다 펼친 만큼 많은 언니였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한 어른이었다.아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표현이 서툰 사람의 기분을. 물에 넣은 설탕 한 스푼처럼, 많은 미소와 낱말 앞에 굳었던 마음이 천천히 녹았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부끄러웠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며 해묵은 마음의 껍질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 다시 갈대처럼 낭창낭창하면서도 부드러워졌다. 먼저 말을 걸고 잘 웃고 금방 표현하는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왔다. 열려 있다는 감각은 두려움 없이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의 실수에 지나치게 귀기울일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불안이나 슬픔이 전염되듯 이해도 전염된다. 그녀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졌듯, 또 내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엉킨 실타래 같은 관계 때문에 슬퍼지거나, 무서워지거나, 고독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가만히 침대에 엎드려, 상어의 지느러미로 양 볼을 감싼다. 상어의 새하얀 배에 코를 부비며 중얼거려 본다. 있잖니, 상어군. 나 오늘은 무얼 잘못했던 걸까. 상어는 내게 배를 맡긴 채 조용히 누워 있을 따름이다.

아픈 감정일수록 빛깔은 선명하다. 채송화처럼 맑고 맑은 고통을 가만히 굴려 본다. 솟는 샘처럼 투명하게 흘러, 마음의 나락을 적시는 통각에 귀를 기울인다. 살아 있구나, 라고 생각한다. 아픔을 느끼는 인간이어서 다행이다. 정직하게 온몸으로 아픔을 마주하고 싶다. 지금은 이 감정에 집중하고 싶다. 그것이 자신의 강함임을 알고, 동시에 약함임을 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통은 생겨난다. 그것을 지금보다 어릴 적에 알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비추는 기쁨의 등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감당하는 건 때로, 아주 약간 버겁다.


3.

돌멩이처럼 어루만질 수 있는 즉물적 감정이 있다면, 어떤 감정은 밀려드는 해일처럼 부정형이다. 균형이 무너진 빈틈에서 쇄도하는 절망 혹은 두려움. 모든 사람을 위해 제각기 알맞은 거리가 있고, 그 직관적인 거리를 찾아 나는 움직인다. 호의와 애정은 본래 공기처럼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좀더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 배우고 싶다는 충동이 지나쳐 도 이상의 에너지가 한곳에 몰릴 때가 있다. 지나치게 기울어진 자신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공포다. 가장 가혹한 형태의 자신이 선언한다: 통제할 힘을 지녔다면 지금 그것을 행사하라! 나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해 균형을 맞춘다. 그것이 설령 파괴와 혹독함을 수반하더라도 상관없다. 언제나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선택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자기자신이다.


4.

지난 겨울, 목도리를 둘둘 감고 소매가 닳은 코트를 걸치고,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거리를 걸을 때마다 생각했다. 내 가치를 바라봐 주지 못할 사람이라면, 내게 어떠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지나쳐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영원히 누군가에게는 익명으로 남은 채, 더 멀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