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たし
무제
호르텐시아
2007. 7. 29. 05:11
두려움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죄의식에 기인한 두려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책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귀신이나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중 마지막 것이 가장 콘트롤하기 쉽다. 공포심에 의해 익숙한 주위의 환경이 낯선 것으로 변하려는 순간을 포착해, 내적 에너지의 벡터를 반탄시킨다 (참 이상한 표현이지만 아직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어두운 다용도실 틈새에 떨어진 빨래를 꺼내 와야 할 때도, 아무도 없는 집의 퓨즈가 나갔을 때도, 어느 한계를 넘지만 않는다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하게 행동할 수 있다.
각각의 두려움마다 특유의 촉감과 냄새가 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의식적으로 제어하고 있을 때도, 통제 하에서 넘실거리며 흐리고 역겨운 냄새를 풍긴다. 현재의 두려움은, 비오기 직전의 쇳맛이 풍기는 대기처럼, 어둡고 무겁다. 아주 또렷해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관찰하는 눈을 감지 않는 한, 어떤 감정에도 압도당하지 않는다.
아주 오랜만에,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마음의 방에 돌아와 있다. 자비심도, 용서도, 쉴 곳도 없는 혹독한 세계.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진다고 했던가. 두려움 혹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회의, 객관적 사실에 바탕한 자기모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그 모든 것의 원천이 되는 자기 자신뿐이다. 내적인 투쟁에서는 타인의 도움을 바라는 순간 지게 된다. 어떤 절망은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이곳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고 싶다. 어떤 것이 진실이라면,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어떤 것이 옳다면, 그 올바름이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다 하더라도 감내하고 싶다. 그럴 힘을 기르기 위해 배우면서,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기면서, 자신과 싸우면서, 속이지 않는 연습을 매일 반복하면서, 가끔은 또 패배하면서, ...생물학적인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 자신을 파쇄할 수 있다. 이미 몇 번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몇 번은 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서조차 홀로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진정 홀로 있는 순간이 언제나 가장 잔혹하다.
조금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째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결함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자기비하를 제어하지 못하고, 어떤 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기합리화를 반복하며, 어떤 이는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시로 찾아오는 절망감은 내 마음의 결함이다.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다면 누가 그 결함을 짊어지고 평생을 갈까.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였으니까. 타인을 위해서는,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방이 따로 있으며, 아마 그곳에서 사랑을 말하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상냥할 수 있도록...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내 결함을 연민하듯 타인의 결함도 연민할 수 있다면.
무식한 버러지에 불과한 네가 뭘 할 수 있겠는가고 묻는 마음의 목소리에,
끝내 지적 세계 끄트머리의 버러지밖에 될 수 없다 해도 버러지로서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어,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평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