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ish Literature

맥베스를 연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

호르텐시아 2007. 10. 1. 01:12



주의: 가능하면 희곡을 직접 읽을 것.



맥베스를 읽으면서 전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선택을 통해 악한 인간으로 변한 선한 인간을 지켜보는 것은, 보통 악인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심사를 불러일으킨다. 맥베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공감일까, 연민일까 혹은 혐오일까.

로저스의 인본주의적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유기체다. 우리가 좋은 학점을 받으려 열심히 공부하고, 좀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좀더 매력적인 이성과 사귀고자 하는 것 역시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현실 세계에서 더 많은 힘과 더 많은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자아의 확장은 곧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맥베스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코도의 영주라는 직위를 얻었다. 그는 세 마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라에 충성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자아실현을 해 왔다. 그러나 마녀들은 지금까지의 자아실현 방식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왕의 자리를 내건다. 왕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는 다르다. 인간 세계, 특히 그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에서 왕이란 유일무이한 지고의 존재다. 현실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는 절대자가 된다는 것은 자아실현의 극치이자 삶의 궁극적인 실현인 셈이다.

때문에 맥베스는 무서운 갈등을 겪는다. 예언에 따른다면 맥베스 자신은 삶의 가장 큰 의미를 실현하게 되지만, 그 대가로 지금까지 쌓아올린 지위와 명망, 양심에 거리낌없이 살아 온 긍정적 자아상을 전부 내버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국 욕망에 따라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고도, 그는 끊임없이 인지부조화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과 두려움에 떤다. 과거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살아갈 수 없을 뿐더러 실패는 곧 자아의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재 진행되는 자아실현 과정에 끝없이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이 되기 전에는 왕을 암살하는 일에, 왕이 되고 나서는 자신의 후손을 위해 뱅코를 제거하는 일에, 그리고 해외로 달아난 정적들과 왕의 적자들을 죽여 없애는 일에 집요하게 몰두하며 그는 점차 광기에 휩싸여 간다.

단 하나 심리적으로 의지할 수 있었던 예언마저 도리어 자신을 기만하는 덫으로 드러나는 순간, 맥베스는 이렇게 읊는다: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이룰 수 있는 최상의 자아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과거의 모든 의미를 저버리면서까지 이룩하려 했던 지고의 위치가 정작 삶을 통째로 파멸시키려 드는 아이러니 앞에 그는 무력하다. 운명이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넣는 그 순간, '의미 있는 삶을 강력하게 염원했던 맥베스는 삶의 무의미함을 깊이 깨닫게 된다.'1)

맥베스는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예언이 결국 자신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시워드의 아들을 죽이고 맥더프와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 모습은 흡사 운명에 맞서 싸우다 끝내 패배하고 마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닮아 있다. 그는 자신의 야망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야망은 언제나 자아실현의 욕망에 따라 발현되며, 다만 그는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실현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에게 욕망의 선택지를 내보인 것은 마녀들로 대변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 운명이었다. 초자연적인 힘은 예정일 뿐이었던 자아실현(코도의 영주가 되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며 그를 영광의 탈을 쓴 몰락의 올가미로 이끈다.처음부터 그는 파멸할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운명에 결연히 맞서다 패배하는 맥베스의 모습은 처절한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이다.


모든 인간은 자아실현을 꿈꾸고, 보다 나은 자기자신을 꿈꾼다. 우리가 맥베스의 악행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그를 섣불리 비난하거나 단죄하기 어려운 것은, 그의 모습이 곧 실패한 자아실현의 모델이기 떄문이다. 그의 선택을 우리 자신의 선택하지 않은 미래와 겹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아실현을 포기하지 않는 맥베스는 지극히 인간다우며, 그의 인간다움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셰익스피어는 맥베스라는 비극을 통해 인간성의 심오한 한 단면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 민음사판 맥베스, 최종철의 작품해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