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미움받지 않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쓰레기인가

호르텐시아 2007. 12. 6. 16:05


공부하러 가려다, 문득 아래 달린 조모 친구의 덧글이 눈에 밟혀 적어 본다.


아무런 맥락 없이도 전달되고 감흥을 주는 단상은 오래 남는 격언이 된다. 그러나 격언이 될 수 없는 대다수 단상은 제 나름의 맥락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아래 적었던 단상은 사실,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식인'에 대해 갖는 전통적인 이미지가 있다. 학식과 지식이 풍부하고, 그릇된 사회현실에 거침없이 일침을 놓을 줄 알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두려움 없이 견해를 피력하는, 그런 사람이 흔히 말하는 '참 지식인'의 상이겠다. 핵심은 두 가지, 거침없는 일침과 두려움 없는 견해 피력이다.

공부를 하고 생각을 하다 보면 어떤 쪽이든 자기 생각의 방향이 잡히기 마련이다. 생각의 방향은 사람마다 다양해서, 학파가 있고 파벌이 생겨난다. 그러니,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며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다른 사람의 관점- 혹은 한 무리의 관점-과 충돌할 때가 있다. 좌파는 우파와, 노동당은 공화당과, 케인즈 학파는 신자유주의와 갈등을 빚는다. 이럴 때 적절한 타협과 이해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 풍진 세상에서 마냥 잘 되리라 바라기엔 조금 힘들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확고한 시각과 입장을 주장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에 걸맞는 잠재적인 반대파- 상황에 따라선 적이 될 수도 있다- 를 예상해야 한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의견 충돌에는 쉽게 다툼이 따르기 마련이다. 변기 뚜껑을 내리느냐 마느냐, 양말을 뒤집어 빠느냐 마느냐를 가지고도 한 집안에 충분히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데, 하물며 신념과 의지를 건 학문적 싸움이야. 적을 만드는 게 두렵다면 자연히 뭔가 말할 때마다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학계를 떠나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표현하기란 종종 어렵고 때로 힘들다. 분식집에서 메뉴 고르는 수준을 넘어선 일상의 많은 견해들은 언제나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충돌한다. 모두가 '예스'할 때 '노'하는 사람은 어떤 대접을 받을까. 여기서 괜히 튀는 발언을 하면 다음 기 승진은 어떻게 되나. 왕언니가 하자는 대로 안 하면 이 그룹에서 왕따를 당할지도 몰라.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 입을 다물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편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다.

다시 지식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아일랜드의 대시인 예이츠는 20세기 목숨을 건 아일랜드의 투쟁과 전란 앞에 침묵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의 펜은 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움직이지 않았는가. 답은 예이츠의 마음 속에 있겠지만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대시인도 시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기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의를 위해 돌아올지도 모를 잠재적인 위협을 기꺼이 감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명예로운 자리에 있을수록, 보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을수록 입을 열기는 점차 어려워진다. 섣부른 말 한 마디가 그 주인의 목젖을 영영 잘라 버릴 수도 있기에.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그 혀의 주인이기에.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이다. 특히 더 많은 먹물을 들이켜고 더 많은 말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서 있다면 이건 참을 수 없이 중대한 문제가 된다. 타인의 미움은 미움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돌아온다. 사회에서의 불명예, 비난, 제명, 추방, 혹은 직장에서의 사퇴 압력, 최악의 경우는 신변과 목숨의 위협까지. 그 모든 미움을 감내할 준비가 되었는가?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수많은 이들의 비난과 욕설을 끌고 돌아온대도 그 말을 돌아온 탕자처럼 기꺼이 맞이할 자신이 있는가? 다른 건 모르겠으나, 그런 의미에서 진중권은 분명히 거물급이다. 남들이 보기에 옳든 그르든, 자신의 양심과 믿음을 걸고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서는 미움받는 법을 배워 두어야 한다.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쓰레기가 된다' 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읽어 준다면 좋겠다. 친구가 순대가 아니라 떡볶이를 먹고 싶다면 양보하는 게 미덕이다. 개신교가 맘에 안 들어 카톨릭으로 개종할 수도 있다. 떡볶이와 가톨릭은 한 인간의 양심 혹은 자긍심에 대해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엔 쉽게 철회해서는 안 되는 견해와 주장이 있다. 한때 항일운동에도 발을 담갔었으나 훗날 민족개조론을 주창한 모 작가 같은 경우는 어떤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깨고 과감히 무소속으로 출마한 모 후보는 또 어떤가. 이유와 상황을 떠나 지금 그들이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 입장이란 때로, 그렇다.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건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인 일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무던한 사람을 좋아하며, 특별한 문제가 없을 때는 그것이 옳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에 꼭 같이 들 수는 없다. 불가능한 상황은 늘 도사리고 있다. 새들과도 짐승들과도 모두 함께 잘 지내고 싶어 노력한 박쥐의 결말은 어떠했는가. 서로가 서로의 한 길 속을 알지 못하는 인간 사회에서 일관성이란 중요한 명제다. 미움받는 법을 끝끝내 배우지 못한다면 언젠가 당신의 별이 당신의 운을 앗아갈 때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다. 비단 사람들의 차가운 눈초리 뿐 아니라, 마음 속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쓰레기란 단어의 함의는 바로 그런 뜻이다.


나 역시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렇기에 아래 포스팅을 보고 불편했을 분들이 혹시나 더 있다면-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 뒤에 숨은 많은 노력과 눈물 앞에 새삼 미안하다. 당신의 세계, 당신이 처한 상황을 놓고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쓰레기라 칭할 수 없다. 다만 내 경우엔, 한사코 미움받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에게 억지로나마 미움받고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자 애쓸 뿐이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준비하기 위해. 결정적인 순간에 나 자신이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 침묵한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고 한다. 비록 천국엔 못 갈지언정, 가장 뜨거운 데는 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