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象

조용조용한 밤의 조각 생각

호르텐시아 2007. 12. 22. 03:58


- 진저브레드맨을 구웠다. 넛맥을 조금 넣었더니 향이 오를 듯 말 듯, 바삭바삭하다. 곧 크리스마스니까.

처음 베이킹을 시작한 건 12월이었다. 그때 처음 사귄 사람과 헤어졌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살아남기 위해선 잠과 밥 이외의 뭔가를 필요로 했다. 어마어마한 정성을 들여 저울이며 쿼버쳐, 전기 거품기를 하나씩 사모으고 매일 오븐 앞에서 밤을 새웠다. 다 먹지도 못할 쿠키, 제노와즈, 무스 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따위를 자꾸자꾸 만들어냈다. 레시피에 손때가 묻고 노랗게 버터기름이 배었다. 파름한 조명 아래 부풀어오르는 케이크 반죽처럼, 고통으로 오롯이 방울진 시간이, 여물어 갔다. 시간이 흘러 이제 밀기울처럼 조금은 덤덤해진 내가 까만 밤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본다. 불빛이 입김에 아롱진다. 곧 크리스마스니까.


- 동기 A와 B를 우연히 만났다. 근 1년 만. 이중전공 뭐하니. 우리들은 경영이야. 넌? 난 영문학. 그들은 납득과 만족이 묘하게 어우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거 할 거 같더라. 어울린다.

파리한 얼굴로 쌍화탕을 문 C는 말했다. 아직도 기억나. 지는 빛 속에서 창가의 수국에 물을 주던 모습이. 난 늘 네가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게 이상했어.


- 식탁 위에 놓인 주민등록등본을 발견했다. 거주지 변경 기록과 연도를 나열한 한 장의 종이는 보이지 않는 막강한 세계와 우리를 연결하는 탯줄이다. 고도로 압축한 인간의 흔적. 팩트 특유의 강렬한 처연함.


- 사람의 정신은 늘 일정량의 벡터 위에서 기능한다.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방향을 틀 수도 있고, 속도를 높이거나 낮출 수도 있지만, 레일에서 벗어나면 예전의 방향성과 속도를 되찾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완행열차가 되어도 좋고 역 앞에 며칠이고 멈춰서 있어도 좋지만, 어찌됐건 탈선만은 금물이다.


- 겨울은 전통적으로 휴식의 계절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