想-象

장례식 단상

호르텐시아 2007. 12. 27. 00:09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는 분 덕분에 뮤지컬을 보고 돌아와, 느긋이 밤새워 놀다가 자리에 들 참이었다.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간단하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난 소설 속의 클리셰처럼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응. 지금은 밤이 늦었으니 일단 자고 내일 와라.

그게 클리셰일 수밖에 없는 건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비슷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리라.

바지도 외투도 죄다 유채색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장롱을 뒤져 발목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모직 코트를 찾아내 걸쳤다. 잠이 모자란 얼굴이 거울 저편에서 창백하게 도드라졌다. 음산한 품이 전설 속의 여자 퀘이커교도 같았다. 하나뿐인 까만 구두는 엄마가 신고 가 버렸다. 택시 기사에게 이천 원을 쥐어주고 부츠 굽으로 뒤뚱거리며 역에 내렸다. 지하철 속에서 가방을 끌어안고 베니어판처럼 밋밋한 머리로 생각했다. 십 년 전과는 달리 코트를 입고 굽 높은 신을 신고 가죽 장갑을 끼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이에 이르렀을 뿐이다. 다만 그뿐이다.

아침 공기가 차갑게 볼을 때렸다. 아스팔트 위에 흰 페인트로 크게 씌어진 장례식장이라는 글씨. 녹지운동장으로 향할 일이 있을 때마다 친구와 내려다보며 웃곤 했었다. 이봐, 우리는 지금 거기 가는 게 아니라구. 어제 아침은 끝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영정을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이 절을 하고, 발갛게 젖은 눈의 어르신들에게 인사 올리고 외투와 가방을 벗었다. 황망한 정신의 내게 상복 차림의 엄마가 다가와 책망하듯 속삭였다. 입관이 열한 시야.



마스크를 쓴 장의사 둘이 냉기를 둘러입고 흰 천으로 덮인 바퀴침대를 끌고 나왔다. 검은 옷을 입은 직계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둘러섰다. 신경이 바짝 긴장했다. 한 명이 맞은편에 서더니 천을 걷고 그 안에 놓여 있던 두 다리를 닦기 시작했다. 엿처럼 허옇게 굳은 그 다리엔 발목도 발가락도 모두 달려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위쪽의 천을 걷어 팔을 꺼냈다. 늘어진 팔뚝의 살갖이 겨우 사람의 몸임을 증명했다. 어린 시절 폐식용유로 재활용 비누를 만든 적이 있다. 겨울이 되면 누런 비누 위에 서리가 보얗게 앉았다. 장의시는 이제 비누 위에 낀 서리를 벗겨내듯 한때 살아 있었던 누군가의 몸통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뭉친 피가 등판에 보일 듯 말 듯 어름어름 번져 있었다. 지독한 색이었다. 코 훌쩍이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삼베 치마저고리까지 다 입히고 얼굴에 씌운 천을 벗겼다. 이미 절반 가량이 울고 있었다. 근 십 년간 명절을 두고 할머니를 뵌 적이 손에 꼽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자식들 집을 전전하며 불평과 하소연으로 세월을 살았다. 노인네가 그 이상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녹내장이 심해져 눈이 멀고, 치매가 오고, 더이상 걷지 못한다는 소식만 띄엄띄엄 귀에 들어왔을 뿐이다. 일이년 전 앞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게 건네 준 이만 원을 싼 봉투에는 짤막한 인사 몇 줄과 함께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사랑한다.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오래 전에 자신에게서 갈라져 나온 생명을 향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삶은 결국 죽음보다 무력했다.

죽어서도 측은한 얼굴이었다. 평소 버릇대로, 살을 맞대고 가까이 지내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저 자리에 누운 걸 상상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무리였다. 의지대로 삶을 끌어갈 처지가 되지 못한다면 목숨을 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고대 로마인들이 했던 것처럼. 뜻한 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뜻한 대로 죽고 싶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죽더라도 두 분 부모님 장례를 내 손으로 치르고 나서야 죽을 것이다. 사람의 모양을 갖추었으되 사람 아닌 것이 되어 눕는 건 차라리 슬프지 않다. 슬퍼하는 건 남겨진 우리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살을 맞대고 가까이 지내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렇게 누운 것을 봐야만 할 것이다. 살아남는 한.



관 뚜껑을 덮고 소지를 끼운 후 검고 하얀 천을 씌우는 것으로 입관은 끝났다. 이미 점심때였다. 올라가서 손님 접대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올라가자 접객실 부엌에 여남은 명의 여자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상냥하고 친절했으며 손이 빨랐다. 나중에서야 그분들이 모 여대 국문과의 석사와 박사들이란 사실을 알았다. 개중엔 아이 딸린 사람도 있고 강의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교수는 고급인력을 부당하게 부릴 권한도 함께 가진다.

얼추 일을 돕다가 손님이 뜸해져 집에 다녀와 보니 현장은 눈이 핑핑 돌 만큼 바빴다. 뛰어들어 정진정명으로 일을 했다. 다 드신 국그릇과 밥그릇을 나르고, 필요한 찬이며 떡을 알아서 갖다 놓고, 그러고도 손이 남으면 빈 테이블을 닦고 주문을 받고 커피를 탔다. 빈 물통은 나름 머리를 써서 아저씨를 불러와 채워 넣었다. 군대를 다녀오면 뺑끼도 알아서 배운다고 하지만 내겐 그럴 기회가 없었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중노동이 낫다. 얄팍한 노동은 권태를 불러온다. 게다가 일손이 한창 바쁜데 '젊은 것이' 놀고 앉아 있을 순 없는 일. 볼이 빨개지도록 일하고 있자니 부엌에 있던 언니들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소속이 어딘지 다들 궁금해했단다. 속으로 쓴웃음이 났다. 교수 눈 밖에 날까 걱정할 일 없이 그릇을 나르는 내 처지가 편한 게다.

부모님의 지인들이 몰려오실 때마다 부르는 대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 말들이야 직장 동료에게 예의상 건네는 인사치레겠지만, 과년한 딸이 방긋방긋 웃으며 공손하게 커피를 대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뿌듯해 보였다. 그래서 기뻤다. 부모님의 자랑, 이라는 표현은 식상하지만 당사자에겐 의미가 깊다.



아홉 시 반이 넘어서야 손님이 뜸해졌다. 장난감 같던 찬거리가 음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발목이 쑤시고 머리도 둔해졌다. 다해봐야 고작 대여섯 시간 정도 일했을 뿐인데, 요식업계 종사자들은 틀림없이 괴로울 것이다. 흘끗 보니 언니들은 바닥에 앉아 귤을 까 먹으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괜찮겠다 싶어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밖에 나가 친척들 사이에 끼었다. 어쩌면 이 모든 숨가쁜 절차가 유독한 슬픔에서 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일지 모른다. 바쁘면 슬픔마저 잠시 잊게 되니까.

 섹스와 죽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테마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예식을 창조해 왔다. 혼인과 장례는 대표적인 사회적 의식ritual이다. 이 사회적 의식에 주체로 참여하는가의 여부는 한 인간의 성년 여부를 판가름한다. 내게는 이번이 처음으로 일손을 거드는 장례식이다. 운이 좋아 주위에 돌아가신 분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동시에 내 자신이 20대의 사회적 적체 현상을 나타내는 개별적 사례이기도 하다. 부모 슬하에서 보호받으며 대학을 다니는 20대가 태반이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그들은 사회의 어린애다. 직장명이며 출신학교명으로 띠를 두른 화환 앞을 어슬렁거리며 지나자니 88만원 세대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우리 세대에선 과연 누가 누구의 화환을 만들어 부쳐 줄까. 여전히 빈소 앞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일을 하다 들어오니 숙모며 올케언니들의 눈빛이 확실히 고왔다. 잡담 속에 부단한 일상이 가득 쥐여 나왔다. 통유리 너머로 사체를 내다보며 깨닫는 삶이 있는가 하면, 건조한 방에서 귤을 까며 웃거나 푸념하거나 투덜거리는 삶도 있다. 사춘기 때는 그토록 경멸했던 수다를 불편하게나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우스우면서도 씁쓸하다. 일손을 돕던 언니들은 모두 돌아가고 여자 친척들끼리 남아서 뒷정리를 마쳤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다들 제각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도 씻고 접견실의 긴의자에 코트를 덮고 누웠다.


땀에 온통 절어서 깼다. 발인이 여덟 시라 모두들 서두르고 있었다. 허기진 뱃속에 아침으로 육개장이 들어가니 위에 먹구름이 낀 듯 저려왔다. 아무래도 위염의 기색이 느껴졌다. 머릿가죽 상처는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왜 이 지랄이니, 하고 속으로 욕을 했다. 그나마 코가 간지러울 때 잠을 푹 자서 다행이었다. 발인실에서 가볍게 천주교 의식을 치렀다. 가사는 기도인데 가락은 장송곡이었다. 아마 인류학적 하이브리드의 결과물일 것이다.

한 시간 반 걸리는 장지에 합장으로 묻었다. 날씨가 맑고 따스했다. 바람도 별로 없었다. 근처 허름한 건물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엄마는 갓 결혼한 형부에게 회계사 신랑감을 좀 소개시켜 달라고 뼈있는 말을 남겼다. 언니도 덩달아 내게 결혼할 사람은 졸업하기 전에 잡으라고 충고했다. 여자는 예쁜 게 최고야. 피부관리도 하고 눈도 틔워. 난 그저 웃으며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러게, 연애할 사람은 많지만 결혼할 만한 사람은 찾기 힘든 시장에서 필요할지도 모르지. 남자들은 어린 여자들이 순수하고 아무 것도 모르길 바란다. 능력 같은 걸 따지지 않는 착한 여자이길 바란다. 현실은 늘 서로에게 어렵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며 대화를 귀담아 들었다. 식비만 칠백여 만원, 전부 천오백 만원 넘게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경약했다. 내가 가진 돈으로 내 장례를 치르자면 거적떼기로 말아 어디 야산에 내버리는 수밖에 없다. 죽은 자를 데리고 장사하는 건 치사하지만 돈을 긁어내기는 쉽다. 누군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에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겠는가.


집에 돌아오자 온몸이 무거웠다. 이틀간이었지만 보고 알게 된 것들은 적지 않았다. 토해내듯 글로써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