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학기-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호르텐시아 2007. 12. 30. 17:40

   

 



엄... 이건 그냥 패스


2007  2학기  ENGL236-02  영문법(영강)  이상근  2중전공선택 A      
2007  2학기  ENGL270-00  근대영문학의흐름(영강-멀티미디어) 여홍상  2중전공선택 A+  
2007  2학기  ENGL280-02  미국문학의흐름  윤희기  2중전공선택 A+                             
2007  2학기  ENGL322-02  영미문학배경(영강)  우정민  2중전공선택 A+      
2007  2학기  ENGL332-00  셰익스피어  전준택  2중전공선택 A+  
4.4. execute.




매 학기 시작할 때, 누군가 보는 데다 결과를 공개한다고 상정하고 임하니 많이 무섭다. 망쳤으면 망친 대로 고스란히 올려야 되니까(...) 대신 그만큼 초심 잡기엔 도움이 되지만. 


학교 다니는 학생 신분으로 연애며 동아리며 학회며 교환학생, 랩어시, 회지 발간이나 공연 등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해봤다 싶은데, 아직까지 못해본 게 딱 세 개 있다.

1. 인턴연수
2. 한 학기 올에이쁠
3. 전액장학금

그런고로- 2번 퀘스트를 좀 클리어해보려는 사심으로..(...) 분투했는데 실패. 핫핫핫. 쌀 99가마니 가진 사람이 백 가마니 채우려 한 가마니 뺏는다고, 저 에이가 못내 아쉽긴 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만큼 다른 과목에 비해 노력이 부족했고, 이 시점에서 저 에이 갖고 울면 대단히 욕먹을 잣이기도 하고.-_-;



다섯 과목이지만 셰익스피어가 발표, 중간, 기말, 연극을 합쳐 근 두 과목 분량이었기 때문에 체감은 여섯 과목이었다. 전선생님 과목을 수업 네 개 분량, 여섯 개 분량, 심지어 18개 분량(.....)으로 간주하는 학생들도 있더라. 

이전에 들었던 수업은 사회언어학이라든지 글쓰기 등 어학에 더 가까웠기에, 진정한 의미의 문학 수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리학과 출신으로 타전공만 다섯 개 넣고 돌린 결과치고는 괜찮다 싶다어째 본전공보다 더 잘 나왔네... 울컥-_-; 게다가 두번째와 다섯번째 수업은 좀 상반된 의미로 영문학과 제일가는 '지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영문과 선배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어째 초반부터 심하게 난코스를 밟는군'이라고 했을 정도니까.-_-; 

1. 영문법


월화수목을 거치면서 앞의 네 수업에 진을 빼고 나니, 금요일 아침의 이 수업엔 유독 소홀했다. 예습복습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종종 지각하고 가끔은 무려 졸기도 하고(!), 심지어 한 번은 레포트도 잊고 안 내서 당일날 바로 써서 제출하기도 하고...-_-; 돌이켜보면 참 진상이었지.

영어란 언어에서 문법의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

수업 자체는 굉장히 좋았다. 보통 문법은 암기해서 실전에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데, 이분 수업은 좀 달랐다. 해석 위주로, 문법의 얼개나 짜임새, 그 구조와 의미가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대해 배웠다. 수업 방식도 구체적인 팩트를 나열하기보다는 독창적인 예시를 통해 암시를 던지는 스타일인데, 내겐 잘 맞았다.  

가령 우리는 현재과거미래를 기본 3시제로 쳐서 하위 네 개로 나누어 12개의 시제가 있다고 배운다. 그러나 하위 네 개- 단순형, 완료형, 진행형, 완료진행형은 시간적 흐름이라기보다는 상황의 뉘앙스를 설명하는 aspect다. 내가 밥을 먹는다고 할 때, '매일매일 밥을 먹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단순형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밥을 씹어 삼키는 상태'에 초점을 맞추면 현재진행형, '밥그릇을 비우는 과정'에 맞추면 완료형을 쓸 수 있다. 즉 화자가 기술하고자 하는 관점에 따라 문법의 활용도 달라진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독자적인 미래시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시제는 be going to 형태나, Modal인 will을 활용해 만드는 aspect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는다. 언뜻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문법을 대하는 관점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으니. 다만 문법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에겐 오히려 혼란을 줄 수도.

문법 속에 양키들이 심어 놓은 직관적인 감각과 뉘앙스

가령 부정관사 A와 무관사를 공부할 때 사과를 예로 들면서, An apple은 우리가 만지고 먹을 수 있는 사과지만 (null) apple은 사과의 '루트 폼', 즉 소수의 제곱근처럼 추상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무관사로 쓰게 되면 'humankind'에 준하는 'applehood' 'applekind'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설명하시는 것이다. 들으면서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참신하면서도 주옥 같은 해설 덕분에, 문법을 넘어서서 영어란 언어 자체를 보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제, Modal, Modal의 활용, 관사/부정관사, verb agreement, 명사, 대명사, 명사절, 형용사절의 개념과 쓰임

교수님께는 감사한데 성실하지 못해서 괜히 죄송한 수업.


2. 근대영문학의 흐름(영강-멀티미디어)


낭만주의에서부터 2차세계대전 이후까지의 영문학의 흐름

작가들의 일생 및 그들의 작품 일부

당시 영국의 사회적/시대적 흐름

...라고는 써놨지만, 솔직히 배운 게 없다. 그런 의미의 지뢰다. 교수님은 실라버스 던져주고 방향만 잡아놨지 나머지는 스스로 공부해야만 했다. 한 시간에 발표를 두세 개씩 돌리고 남는 시간은 에세이 써온 걸로 토론 시키고, 영어로 강의하는 시간이 막판 2-3분 내외였으니 말 다했지. 그나마 내가 던져주면 알아서 혼자 공부하는 타입이라 다행이었다. 그래서 가장 어려워 보이는 책(그게 문제의 노튼이었다)을 골라 붙들고 소위 시쳇말로, '뽕을 뽑았다'. 진도표에 있는 작가는 다 체크해서 클리어하고 시대배경도 나올 때마다 찾아서 완독하고, 가끔은 진도에 없는 것도 읽어 보고. 나중엔 시험지에 쓰고 싶은 작가들이 너무 많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클릭하면 커진다.
글씨가 너무 작아서 두 시간만 정진해서 보면 두 겹으로 보인다.
몇 번이고 눈을 비벼가면서 읽었는지...
가운데 '이하 모더니즘 5대천왕- 노튼협찬' 이라고 끼적여 놨네.-_-;>


<간지폭풍 만프레드>

그-렇-다-고 해도! 은근히 화가 나는 게, 신입생도 있고 영 멋모르고 들어온 타전공 학생도 있는데 개론 수업이면 좀더 성실히 해도 좋지 않은가 말이다. 발표 듣고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하면 발표자는 쫄고, 교수는 막 '그런 건 니가 더 잘 아니까 니 혼자 공부해라' 라고 은근히 영어로 짜증낸다-_-; 게다가 지적할 게 없어서 맞춤법만 지적하냐. 강의평가도 아주 harsh하게 써놨다. 내가 이 수업 다시는 듣나 봐라.

혼자 파면 어떻게든 잘 된다는 깊은 자신감

가르침을 준 노튼에게 감사하는 의미-_-에서 몇 마디 적어 보면,

작가들의 일생 부분을 읽으면서 배운 게 많았다. 작가는 시대와 영향을 주고받고, 작가가 받은 영향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니까. 시대 흐름을 대충 알고 있으면 작가의 생몰연대만 들어도 그 작가의 개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내가 읽은 판은 8번째 에디션이었는데, 에디션을 거치며 새로이 추가되는 작가도 있고 수정되는 사항도 있다. 읽어보니 이 책은 현대로 갈수록 작가들을 유독 칭송하는 경향을 띠는데(옛 작가들에 비해 객관적인 판단의 근거가 될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게 이유인 듯- 뭐 책 만드는 사람의 입김도 있겠지만), 가령 엘리엇이나 예이츠 같은 경우엔 칭찬 일색이다가 이번 판에 와서 조금 비판이 가미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칭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특히 시대의 이슈(빅토리안에서는 대표적으로 네 개 정도- Women Question, Evolution, Imperialism and national Identity, Industry: Progress or Decline?) 및 사회흐름에 대해 다룬 부분을 읽다 보면, 2007년의 세계가 무엇에 의해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져 왔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울러 지금의 나를 만든 사상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다양한 요소와 사건이 얽히는 가운데 생겨나는 큰 맥락을 잡을 수 있게 되면서, 다른 분야로 이어질 만한 종말 시냅스를 많이 형성할 수 있었던 게 보람이라면 가장 큰 보람.

좋은 발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늘어난 토론과 영작 스킬

뭐, 에세이나 토론도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긴 했다. 에세이를 쓰려면 먼저 주어진 작품들을 읽고 비교해야 하니, 읽는 과정에서 또 감동 먹을 일이 생기고. 쓰기 귀찮아서 빨리 쓰려다 보니 시간도 단축되고. 토론하면서 남들의 생각을 듣고 또 새로운 생각이 솟아나와서 좋고. 그나마 귀국자녀*-_-* 몇 명이 함께 한 관계로 좀 토론할 만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니 망정이지.

귀국자녀 중에서도 02학번 안모씨가 독보적이었는데, 발음도 좋고 쉽게 말할 뿐더러 아이디어도 풍부하고, 발표도 아주 좋았다. 진짜 훌륭한 복학생의 모범이었다. 그분이 한 발표는 아직도 인상에 깊게 남고, 프린트도 따로 모아 둘 정도니까. 버지니아 울프 발표할 때는 그분이 날 지목해서 트라우마에 대해 설명을 부탁하는 등 전체적으로 훈훈했다. 시험 끝나고 한 학기 동안 수고하셨다고 인사라도 건네려고 했는데 먼저 나가시고 없더라. 그래도 여기다가 써서 대신 칭찬한다*-_-*

내 발표는 순 꽝이었다.-_-; 재미있게 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기기가 어렵더라. 그래도 세 번 했는데 도레미 치듯이 점점 나아져서 다행이었다.


3. 영미문학배경 (영강)



...사실 두 수업이 어떤 의미로는 비슷했던 관계로, 딱히 할 말이 없다. 일단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고, 저학번 된장남녀애들이 심하게 많았고, 이해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니까 수업 내용 막 깎여나가고, 나중엔 실라버스가 다 무너져서 일대 환란이 왔다. 소규모 세미나식이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역시 노튼을 지팡이 삼아 의지하고 ㅠ_ㅠ 수업중에 배운 건 많지 않은데 시험은 꽤나 어려웠다. 받아보니 아이덴티피케이션도 많고, 공부 좀 소홀히 하고 책 안 읽었으면 틀림없이 낭패를 볼 문제들 투성이였다. 오히려 이 수업은 수업 외적인 부분에서 더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 앞에 나서서 설레발치는 데 필요한 용기

선생님이 너무 많은 된장남녀들에게 허덕이고 계시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기자재 담당을 하겠다고 한 덕분에 수업 내내 조교 비슷한 역할이 되었다.-_-; 시간마다 15분씩 일찍 와서 기자재 대여해서 세팅해 놓고 마지막에 남아서 뒷정리하고, 시험 10분 늦는다고 칠판에 공지쓰고, 등등.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예뻐해 주시는 게 느껴지고, 왠지 잘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압박이 느껴지고, 수업 할 때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면 (당연히 아무도 안 대답하니까) 나서서 대답하는 등 수업 도우미 역할도 함께 하게 되었다. 나와서 자발적으로 발표할 사람- 같은 거 하면 당연 내가 나가서 해야 되는 거다.-_-; 아무도 안 나가면 뻘쭘해지니까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번 이렇게 되고 나니 수업을 쨀 수도 없고 졸 수도 없더라. 힘들었다.

영문과 애들 보기엔 웬놈이 나타나서 전후좌우로 설레발친다고 생각했겠지. 뿌듯함과 동시에 심적 압박도 작진 않았다.-_-; 그래도 전반적으로 볼 때 알아서 자원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던가.

기자재 조작하는 스킬(이라고 쓰고 임기응변이라고 읽는다)

수업한 데가 참 기계가 안좋아서, 수시로 작동이 안 되고 지지직거리고 멈추는 등 다양한 액션을 선보였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뛰어나가 조작하고 기계 만지고, 전혀 모르더라도 만지는 척이라도 일단 하고, 정 안 되면 밑에 내려가서 사람을 불러오는 등 이것저것 했다. 기계 다루는 법은 하나도 몰랐는데 지금은 최소한 두려움은 사라졌으니 좋은 일이겠다.




4. 미국문학의 흐름


성적 나오고 나서 레포트 돌려받으러 찾아뵈었다. 중간 기말 각각 1등이었고, 발표/참여/레포트 합쳐서 역시 전체 1등이었다고 하시더라.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수업이 너무 좋았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수업은 이번 학기 마이 베스트였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들은 수업 중에서도 단연 3순위 안에 든다.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미국문학 및 역사의 개략적 흐름

앞의 영국문학과는 달리 아주 제대로 배웠다. 한글 수업이란 것도 한몫했을 듯 싶다. 중요한 포인트를 교수님께서 다 짚어주시니 어찌 아니 받아먹을 수 있으랴. 미국적 가치의 두 가지 테마- 'Dream'과 'Apocaliptic Mentality'를 큰 줄기로 제시하고 이후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들을 하나씩 다루었다. 영국과 미국의 낭만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표현형으로 드러나는가, 등등. 배운 걸 쓰기 시작하면 너무 길어지니 여기서 일단 끊을 수밖에 없겠다. 다만 개론이라는 과목의 특성상 적절한 깊이와 범위였다고 생각한다.


<맨 아래 물결무늬. 노튼의 이런 쎈쓰 좋다.
종잇장은 사전인데 시대배경이나 작가는 글씨들이 다 저 모양이다.
작품 읽을 때를 손꼽아 기다렸다 -_-; 폰트가 1폰트 커지는데 눈이 훨씬! 덜 피곤해 ;ㅁ; >


이름만 대충 알던 작품 하나하나의 의미와 감동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 목록이 학기초에 나와서 그걸 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드넓은-_-; 노튼 책에서 요소요소 포인트만 엄선하려고 애쓰셨다 싶다. 수업 중에 다룬 작가는 스물여섯 명 남짓으로, 네 개 정도 나오는 시대파트는 따로 수업으로 처리하고 한 시간에 보통 두 명 정도 발표와 함께 설명이 곁들여졌다. 작가보다도 작품에 핀트를 맞춘 덕분에 영국문학에 비하면 훨씬 깊이 있게 한 작품의 의미를 파고들 수 있었다. 교수님은 발표시킨다고 마냥 방관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셔서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거나 놓친 부분을 짚어주거나 하셨다. 이러니 한 작품을 읽어도 제대로 읽는 기분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뿌듯함과 감동을 안고 교실 문을 나서곤 했으니까. 지금도 작품 목록이 적힌 실라버스를 보면 각 작품의 함의를 한큐에 한 줄로 뽑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미국의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포인트는 끼워둔 흑장미꽃 *-_-*>


자발적 예습복습의 가치

책에 의존하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늘 교수님은 수업 전에 책을 미리 읽어올 걸 종용하셨다. 읽어보니 왜 그런지 알 것 같더라. 작품을 미리 읽고 수업 들어갈 때와 안 읽고 갈 때 체감하는 수업의 퀄리티가 엄청나게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뜸 읽고 와닿았던 인상이나 감정이, 수업 시간에 전달되는 심화된 지식 및 해설과 어우러져(아, 그 느낌의 정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감동의 3단콤보를 형성하는 것이다. 안 읽고 가서 수업중에 얻은 지식만을 토대로 나중에 작품을 읽으려고 하면 도저히 그런 느낌이 안 든다. 처음엔 초심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엔 그 감동을 놓치기 싫어서 악착같이 읽고 가게 되더라. 연극하느라 바빠서 불가항력으로 못 읽고 간 날엔 수업 내내 우울할 정도였다. 자꾸 언급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하지만-_-;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참 좋은데도 가슴 속엔 아무런 인상도 남아 있지 않다. 예습도 못해갔을 뿐더러 수업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졸았거든. 정말 예습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꼈다.


<문제의 빨간책과 노튼 두 권.
별명이 벽돌이다. 저 모서리에 찍히면 실신이다.
동시에 두 권을 들고 이동할 순 없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흉기.>
>



5. 셰익스피어


네 지뢰입니다. 그러나 앞의 지뢰와는 180도 차원이 다른 지뢰였다. 진짜 빡센데 얻어가는 건 진짜 많은 수업이 전선생님의 수업이다. 왜냐하면 조별 발표도 있고 중간 기말은 다 보는데- 작품을 원서로 꼼꼼히 읽지 않으면 백 프로 피 보는, 그런 작품이 수업마다 한두 개가 아닌-_-; - 연극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이 분이 연극연출 전공이시라 하시는 수업도 미국희곡, 영국희곡 이런 것들이다. 덕분에 아마추어 연극이긴 하지만 요구하는 수준이 높다. 기대 수준에 못 미치면 또 피본다. 맞다, 관련된 연극도 보라고 시키는데 체크 안 한다고 안 보면 또 피본다. 출석도 두 번 이상 빠지면 반드시 피본다. 할 건 많고 피볼 일도 많다. 그래서 무섭다.

워낙 빡세서-_-; 거기다 빡센 티를 감추지도 않기 때문에 쪼렙들은 알아서 빠져나가고, 재수강이나 이미 들은 사람들만 듣는다. 덕분에 고학번이 많고 사람들도 다들 개념과 양식을 갖추고 있다. 함께 하기 참 좋았다. 교수님도 특유의 끼와 카리스마 때문에 매니아가 많은 수업이다십년쯤 후에 돌아와서 공략하면 안되나요 완전 제 스타일 므흫

셰익스피어 희곡(희극 셋, 비극 둘, 사극 하나)을 제대로 배우다

시험 보느라고 두세 번씩 읽었으니 이건 뭐-_-; 특히 시험 직전에 한시간 남겨놓고 여섯 개를 한번에 다 읽어야 했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 우리 조가 플레이한 게 특히 햄릿이라, 햄릿은 각 막과 장에서 뭔 일이 벌어지는지 다 외웠다. 뭐 곧 까먹겠지만.-_-; 좀 중세 영어에 가까워서 해석이 어려웠는데, 읽다 보니 또 잘 읽어지더라. 십이야와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그냥 읽어도 감동을 느끼며 읽을 만했다. 희극이 상대적으로 쉽기도 하고, 맥베스는 비극이지만 단선 라인에 스피디하기 때문일 게다. 햄릿은 번역본 없으면 무리다.-_-; 사랑의 헛수고도, 재미있긴 한데 말장난이 많아서 내이티브가 아니라면 헷갈리는 부분이 많다.

원서와 번역본은 서로 다른 두 작품이란 걸 느꼈다. 원서만 보면 해독이 완전히 안 되고, 번역본만 보면 같은 문장을 원서로 읽었을 때 갖는 함의를 충분히 못 느낀다. 신정옥 교수가 번역한 녹색 전집이 있는데, 그것보단 민음사에서 최종철 교수가 번역한 버젼이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산문인 전자와는 달리 verse 형태를 살려 7.5조를 맞췄기 때문이다. 4대 비극은 일단 다 번역된 걸로 알고 있다.

희곡 및 연극에 대한 이해/소질없음의 재발견

글로브 극장에서 셰익스피어리언 스타일로 공연하는 사랑의 헛수고와, 데클란 도넬란이 연출한 십이야를 관람할 기회를 가졌다. 수업에서 알려주지 않았으면 모르고 그냥 넘어갔겠지. 십이야의 경우 몇 번이고 커튼 콜이 이어졌다.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다양한 연극과 영화를 보면서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어댑트되는가, 희곡과 연극은 어떻게 다른가, 연출은 왜 중요한가를 배웠다. 어댑태이션의 사례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구모노스조' (한국어 제목은 '피의 옥좌')를 감상했는데, 느낀 바가 많았다. 햄릿의 경우 수시로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데, 가령 '클루리스'에서는 폴로니우스의 대사 인용문제로 주인공 여자아이가 예일에 다니는 똑똑한 라이벌의 콧대를 누른다. '라이온 킹'에서 심바가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는 장면은 햄릿 1막 5장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에선 주인공의 상상 속에 올리비에의 유약한 햄릿이 아놀드 슈왈제네거로 변신해 NOT TO BE를 외치며 전부 쏴죽여 버리고 끝을 낸다. 모두, '어떻게 할리우드 영화가 원작을 미국적 가치와 성향에 걸맞도록 교묘하게 재창조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공연을 직접 해 보니... 연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_-; 힘들고 힘들고 힘들었다. 내 안에서 뭔가를 이끌어내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다만 춤이든 뭣이든 해보면 최소한의 눈은 생기는 법. 그런 의미에서 도움이 된 것 같다.

팀웍의 직접적인 체험

다섯 명이서 한 달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들 아마추어고 지도하는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잘 해보려니 시간은 시간대로 무한정 들어가고 체력소모도 심했다. 11월 내내 수업이나 과외가 없는 시간은 점심저녁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연극에 들어갔다. 처음 대본을 짜서 사람들 앞에서 보여줬는데 다들 웃는 바람에, 진지한 토의 끝에 닷새 동안 새 대본을 만들어 암기하고 리허설을 돌리고, 일들이 많았다. 저마다 의견 차이도 있고, 다들 지친 와중에 싸움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팀원들이 다들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렇겠지. 자유시간도 모조리 뺏기고,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결과가 어떨지 몰라 힘든데도 불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실제로 다른 조에선 심한 트러블 때문에,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그 건으로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하면서 세상엔 다양한 재능과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 내 의견만이 늘 베스트가 아니란 것, 나서고 싶을 때 팀웍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먼저 공을 돌리는 법 등등을 배웠다. 덤으로- 일단 상호 존댓말을 그만두고 나이를 까기 시작하면 제일 나이 어린 사람은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는 것도.



공부는 한 만큼 나온다. 가장 정직한 사업이다. 조금이라도 노력이 부실했던 건 바로 티가 난다. 이번 학기의 결과는 운이 아닌 온전히 내 노력으로 이룬 것들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한 이삼 년쯤 지나, 먼 훗날의 내가 행여나 권태에 잠겨 있다면, 지금 자세히 적어놓은 이 글을 보고 자극을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