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말할 수 없는 비밀

호르텐시아 2008. 1. 31. 13:15

<다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 라고 써놓았는데 생각해 보니 스포일러라 할만한 게 없네요. 그냥 읽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_-;;>



1. 한순간 영화의 장르에 중화 4천년급의 반전이 일어난다. 연애에서 공포물에 판타지로. 빠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2. 두 달 전에 이걸 봤으면 진부한 낚시라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ㅡ 저럴 줄 알았으면 나도 피아노. 피아노나 좀 열심히 배워둘걸 흑흑. 나도 피아노를 배워서 4차원의 세계로 순간이동해서 첫사랑을 만날래. 너무 늦었나요 현실이 팍팍해 흑흑. 이 영화가 유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좀 열고 봐라. 코코로오 히라이테! 참으로 풋풋하고 훌륭하고 좋은 영화인 듯합니다.


<시작하면 등장하는 아열대의 아름답고 푸르른-_- 고등학교 전경>

3.  학교가 진짜 좋다. 무슨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야자수에 파초에 바오밥나무 같은 것들이 교정에 가득 우거져 있다. 분명 로케이션은 중국일 텐데, 말하자면 오나라의 후예들인가. 수업도 영어로 하는데 다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차분하게 따라간다.
교수 아빠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 강력한 포스에 벽안인 줄 알았다.


<학교 등하교길도 한 폭의 수채화.-_-;>

4. 캐릭터들도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교복은 앙드레김의 손길을 거친 듯 화사하기 그지없다. 중간에 나오는 럭비부 한량들 헤어스타일과 피아노 배틀이 좀 간지. 연주를 하는데 손놀림이 무슨... 연애도, 비오는 날 자전거 얻어타는 전형적 공식. 남자는 느끼하고 여자는 귀여운 척하는데 세 씬 정도 흐르고 나니 금세 애인사이가 돼서 아이스크림으로 건배도 한다. 덤으로 여자애는 지병인 천식도 있다. 근데 천식에 정말 사과가 좋은가? 


<수업종이 땡 치자마자 이런 식으로 뒤에 이쁜 처자를 태우고 놀러가는거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5. 학교가 진짜 좋다 2. 일단 입시지옥이 없는 듯하다. 쾌활발랄하게 스포츠도 즐기고 축제에서 춤도 춘다. 단체로 지터벅을 추는데 수준급이다. 볕좋은 오후에 수업이 끝나면 아름다운 아열대의 풍경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레코드샵에 가서 문화생활을 즐긴다. 그러니까 애들이 얼굴이 펴서 저렇게 화사하고 성격도 좋지. 흑흑.

6. 캐릭터들도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2. 중국 애들의 우직함이랄지 천진함이랄지,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젊은 느티나무' 읽고 눈물 흘리던 시대의 감성이다. 럭비부 2인조는 건들건들한 양아치를 그려보려 한 것 같지만 너무 해맑고 순진해서 낭패. 음악을 좋아하는 교수 아빠는 점잖은 줄 알았더니 탱고를 추는가 하면 마구 기타를 치면서 아들을 위로한다. 간만에 최고 웃겼다. 천진난만한 미중년 화이팅. 


<보지도 않고 정확하게 한손연주.-_-; 계륜미가 '나머지 한 손은?' 이라고 묻자
'그 손으론 네 손 잡아야지' 라고 대답하는 느끼함.
이런건 남이 보면 느끼해도 당사자들에겐 바람직한거다.>

7. 그렇다고 애들이 절대 바보가 아니다. 중간에 계륜미의 방이 나오는데 책이 온통 ABC온라인에서 1달러 주고 산 것 같은 낡은 원서들이다. 다 합쳐 백여 권은 될 것 같다. 근데 피아노도 잘치고 그림도 잘그린다. 앞서 말한 2인조 중 럭비부 주장은 개그 캐릭터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혼자서 적진을 뚫고 터치다운을 하는 실력에 무려 밴드 보컬이다. 역시 입시지옥이 없어서 전인교육이 가능한
게지. 음음. 머리도 좋고 선량하고 순진하고.

주걸륜도 만만치 않다. 느끼할 뿐더러 피아노도 잘치고 요리도 잘한다. 당근을 써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많이 해본 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렇게 요리를 해서 아버님을 먹여살리고 여친에게도 지극정성이다. 음악실이 포크레인에 부서지는데도 아랑곳않고 눈을 부릅뜨고 연주하는데 그 기백이 좀 짱인 듯. 외모도 보다보면 정감이 간다. 반할 것 같다. 

8. 그냥 현실연애물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기분이지만, 연애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보면 (진심으로) 꽤 잘 만들었다. 특별히 흠잡을 데도 없고, 스토리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씬에서 전해져오는 느낌이나 색감도 좋다. 단지 시대적으로 약간 감성이 뒤처진달까. 우리나라에서 '동감' 개봉했을 때의 느낌.


9.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야자수가 있지만 봄가을 교복으로 마이를 입을 수 있는 환율이 저렴한 지방- 에 집을 하나 사서 안팔리는 글이나 쓰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좋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