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물은 버릇처럼

호르텐시아 2008. 10. 5. 22:52


최근 핸드폰을 바꾸었다. 예전 것이 언제 수명이 다할지 몰라, 그래도 저렴할 때 사두자 싶었다.

낡은 핸드폰에선 열쇠고리를 제외하고 변변히 떼어낼 것도 없었다. 이제 폴더를 열면 파란 붓꽃 위에 '개통이 필요합니다' 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그걸 읽을 때마다 하나씩, 상념이 떠올라 맴돈다.

처음 내 것이라 할 만한 폰을 가져본 게 2003년 11월 5일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고사장에서 나온 내게 아버지는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적당히 둥글고 양감이 있는, 싸이언의 새하얀 거울폰이었다. 가장자리의 키패드를 누르자 시간을 알리는 파란 OLED가 거울 속을 가로질러 사라져갔다. 그 파란색에 매료되어 몇 번이고 거듭거듭 눌러보았다. 뿌듯했다. 반짝반짝하고 한손에 쏙 들어오는 핸드폰이 생겼어. 내 거야. 응, 내 것. 이제 언제나 어디서나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어. 자유롭게.



시끄럽지 않고, 불필요한 기능이 없는, 심플한 폰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청소년 요금제였다. 대학 4년 내내) 문자함는 수/발신 각 50개가 전부였지만, 덕분에 중요한 글귀나 맘에 드는 문자는 고이 모아 두게 되었다. 그렇게 고르고 모으다 보면 2년치의 생일축하 문자가 동시에 들어 있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발신문자는 100바이트 제한이라 길게 쓰기도 어려웠지만, 머리를 굴려가며 문장을 뽑는 것도 즐거웠다. 가능한 한 짧으면서도 내용은 다 들어가도록.

수신함이 꽉 차면 문자가 튕기는데, 급히 맨윗문자를 지우고 기다리면 처음 몇 분 안에 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12분까지 늦춰지고 말았지만. 빨리 보고 싶을 때 내 번호로 되먹임 문자를 보내면, 화면이 순간 하얗게 되었다가 금세 노랗게 새 문자 표시가 나타난다 (물론 그 즉시 되먹인 문자가 뚜둑 하는 진동과 함께 날아오니, 두 개씩 비워놓지 않으면 되튕겨 낭패를 본다). 잘 날아가다가도 '배터리가 약합니다!' 메시지가 뜨면 그때부터 한없이 늘어져 결국엔 전송실패가 되곤 했다. 나중엔 기계 특유의 성벽이겠거니, 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처음 다운받은 벨소리는 천사소녀 네티였다. 방에 앉아 두툼한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벨소리를 듣고 있으면 즐거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진동으로 바꾸고 말았지만(덕분에 mp3 기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웃오브안중으로 전락하였다), 곧 울리는 소리만 듣고도 내 폰이 부르는 줄 알게 되었다. 몇 분의 1초쯤 더 길게 울리면 전화, 그보다 짧으면 문자였다. 가끔은 걷다가 바지에 스치는 느낌이 진동이 아닌가 하여 멈춰 서기도 했다.

사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시는 사진기능이 장착된 폰이 마악 풀리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그중 이 거울폰은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 같다. 요즘 나오는 폰에야 비할 바가 아니지만. 화질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풍경을 찍을 때만큼은 괜찮은 편이었다. 빛의 왜곡이 심한 탓에 의외로 느낌이 좋은 사진이 나올 때도 있었다. 역시 용량이 적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사진만 추리고 추려 모으다 보니 그 자체로 5년 분량의 기록이 되었다. 폴더를 열어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사진 속에 시간이 깃든다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조악한 320X240 사진은 그 속의 풍경 뿐 아니라, 당시 버튼을 누르던 나 자신의 위치와 시선마저 상기시켜,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010이 도입되면서 하나 둘씩 주변 번호들이 바뀌어갔다. 헌데 인식이 되지 않아서, 010으로 검색해 넣으려 하면 올바른 번호가 아니라는 말이 떴다. 덕분에 가까운 사람들 번호 스무 개 정도는 외고 다니게 되었다. 자판이 닳으면서 글씨가 없어지고, 그 틈으로 파란 불이 조금씩 비쳐나왔다. 얇은 배터리가 말을 안 듣게 되어 두꺼운 걸로 바꿔 끼고 다니기 시작했다. 패드의 가장자리도 얇게 벗겨지고 때가 묻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겉으로 보기엔 하얗고 미끈했다. 특별한 고장도 없었고 배터리도 잘 버텨 주었다. 혹자는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제 기능을 묵묵히 다하는 충실한 폰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어쨌든 기계에게도 수명은 있다. 4년째를 무사히 넘기고 2008년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좋지 않은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꺼져 있어 폴더를 열어 보면 배터리가 심하게 과열되어 있었다. 옆버튼을 눌러도 일정이 뜨지 않았고, 가끔은 오가는 문자가 홀연히 사라져 빈축을 샀다. 무척 좋아했던 거울 속의 파란 OLED가 물결치듯 심하게 깜박이더니 어느 날부턴가 완전히 꺼져, 폴더를 닫아도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충전에도 문제가 생겨 결국 올해 초 A/S를 받았다. 말하자면 위장 절제술이라도 되는가 싶다. 그 이후로도 충전기를 그냥 꽂으면 불이 들어오지 않아, 일부러 눌러 꺾어 주어야만 했다. 덕분에 가방이며 책을 써서 여기저기 괴어 놓고 눌러 놓는 게 자기 직전의 일과가 되었다.



이 정도가 되고 보니, 불펀에 둔감한 나도 슬슬 핸드폰이 오래 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이든 생물에게 노환이 찾아오듯 처음 산 내 핸드폰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구석구석의 사소한 기능부터 말을 안 듣다가 점점 중요한 부품까지 맛이 간다. 섣불리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조마조마하기가, 한집살이를 한 늙은 개를 보는 심정이 꼭 그럴 것만 같았다.

그 지경이 되어도 여전히 중요한 기능은 정정하게 살아 있었다. 통화품질도 변함없었고 배터리도 24시간은 버텨 주었다. 안 눌리는 버튼도 없었고 다운되지도 않았다. 사진도 잘 찍혔고 알람이며 벨도 정시에 울렸다. 사실 난 괜찮았다. OLED가 사라진 건 애석하지만 안 보면 그만이고, 충전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못 쓰게 되지 않는단 보장이라도 있다면 아마 내년까지라도 계속 쓰고 있겠지만 그것조차 모르는 일,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리면 당연히 그 뒤가 걱정이었다. 전화번호부가 싹 날아가 연락이 어렵게 된다. 문자며 사진도 잃어버린다. 아무리 급하게 신규가입을 해도 하루이틀의 공백이 생기고 만다. 급하니까 조건을 제대로 따져보지 못해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이단콤보로 엄습해, 결국 5년째를 며칠 앞두고 번호를 해지하고 말았다. '개통이 필요합니다'란 글귀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영 기분이 시원섭섭했다. 우스운 생각이지만 생일이나 쇠어 넘기고 끝낼걸 싶었다.



지름이 미덕인 요즘 세상에서 누가 이렇게 바보같은 짓을 하랴 싶다. 깨끗한 새 폰이 달마다 헐값으로 쑥쑥 쏟아져나오는 마당에. 첫째는 내가 이런 쪽에 맛이 가다시피 게을러서이고 둘째는 청소년 요금제가 아까워서일 테다(웃음) 그리고 굳이 세 번째가 있다면, 참 우습지만, 오래 쓴 사물은 어쩔 수 없이 정이 간다는 이유 때문일까. 입맛대로 기능을 커스터마이즈하고 길이 들고 때가 타고 기계 버릇에 익다 보면 그것도 참 편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5년 가까이 A/S는 한번뿐, 별탈없이 기특하게도 버텨 준 걸. 아무리 기계라도 내가 써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그걸 한번에 내버리기가 마음에 걸렸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바보같지만, 제 기능을 다한 녀석이 결국 버림받는 걸 보는 게 싫었던 걸까.

비단 핸드폰뿐 아니라 얼마 전에 신발도 바꾸었다. 미국에서 내내 신고 다녔던, 제일 편하고 좋아했던 까만 운동화인데, 밑창이 닳고 앞이 터지고 심지어 옆에도 구멍이 나서 흰 양말을 감히 신지 못할 지경이었다(그래도 피곤하면 그냥 꿰어 신고 다녔다- 볼 테면 보라지. 보그나 엘르지의 편집장은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생물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통탄하겠지). 결국 지극히 실용상의 문제로 아울렛에서 새 까만 운동화를 구입하면서,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집에 오면서 문득 생각했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신발 노릇을 했는데, 늙고 지쳤지만 평소처럼 제 노릇을 하러 갔다가 어? 하는 사이에 쑥 벗겨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그게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고 한다니, 그런 비참한 운명이 어디 있나. 참 좋아한 신발이었는데. 미국에서도 내내 발이 되어 주었는데. 신고 있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운명에서 건져 줄 순 없을까. 하지만 그런답시고 도로 들고 와도 결국 버릴 수밖에 없겠다 싶어 애써 잊어버리기로 했다. 핸드폰도 신발도 결국 수명이 다하면, 버려질 수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사물은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오래된 사물이 주는 아련함이며 버림에 대한 저항감은 결국, 내가 쏟은 감정이고 시간의 되먹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버려지고 잊혀진다는 건 (적어도 내게는) 슬픈 일이다. 지난 2002년 폴란드전의 밤에 종로서적이 영영 문을 닫았던 것처럼 말이다. 저녁시간에도 텅텅 빈 테이블에 조마조마하며 지켜보았던 버스 차창 밖의 가게가, 결국 문을 닫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바보 같지만 역시, 쓰기 시작한 물건은 계속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때가 타면 닦아주고 고장나면 고치고 구멍나면 꿰매면서 가능한 한 오래.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사물엔 주인에게서 옮아간 특유의 정감이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 다음에 남편 데리고 살아가는 것도 이와 비슷하려나 (웃음) 코 닦아주고 얘기 들어주고 말 안 들으면 야단치고 잡도리하고 길이길이 정들면서. 사물보다도 못하면 곤란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