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LIFE
버스와 사회 규범social norm
호르텐시아
2009. 8. 9. 13:19
- 집에서 역으로 가는 유일한 노선인 초록색 모 버스엔 딱 하나 골치아픈 점이 있다. 내려야 할 정류장 팻말은 2번 출구 바로 뒤에 있지만, 길이 워낙 좁기에 막힌다 싶으면 팻말까지 한참 남았는데도 서 있는 자리에서 대충 문을 열어버린다는 게 그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버스기사에게 잘 보일 정도로 인상을 쓰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터벅터벅 걸어간다. 몇 분만 기다려 주면 신호가 바뀌면서 저 앞까지 갈 수 있잖아! 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지 못하는 거야! 그런다고 말로 부탁할 수 있냐면("저기요, 24m 더 가셔서 다시 세워 주세요.") 어쩐지 그러진 못하겠다. 성가신데 미묘해서 입 밖에 내기 어려운 것들은 세상에 너무나 많고, 이 문제는 그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은 벨을 누르되 내리기 직전까지는 자리에 앉아 있기로 했다. 차가 막혀 한참 서 있는 동안에도 버스기사는 문을 열지 않았다. 파란불이 되어 앞차들이 움직일 무렵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자, 버스는 자연스럽게 정류장 바로 앞에 멈춰서서 나를 내려 주었다. 빙고. 그 이후에도 상당히 높은 확률로 이 방법은 통하고 있다. 물론 성급한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 문간에 서 있으면 그날은 실패지만.
핵심은 비언어적 사회규범non-verval social norm이었다.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단순하다. 벨을 누르면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 선다. 이것은 버스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규범들 중 하나이다. 여기에 비언어적 소통non-verval communication이 첨가되기도 한다. 가령, 일어나 문간에 미리 서 있는 것은 (의도하든 아니든) 내릴 테니 어서 문을 열어달라는 무언의 신호다.
이때 차가 막히게 되면, 서 있는 사람의 존재는 버스기사에게 사소하지만 확실한 심리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잠시라면 모르겠으나 계속 멈춰 있는 상태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건, 실제로야 어떻든 특정 승객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사회규범을 위반하고 있다는 심리적 불편감과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버스기사는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바로 문을 열어 승객을 '떨군다'. 반면 벨만 누르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음 정류장에서 누군가 내린다는 신호는 가되, 당장 문을 열라는 직접적 압력은 주지 않는다. 자연히 버스기사는 막히더라도 눈치 볼 것 없이 본래 서야 할 위치에서 문을 열고 승객을 내려 주게 된다.
단순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비언어적 사회규범 non-verval social norm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사람의 행동을 제어한다. 비단 버스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