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LIFE
개강
호르텐시아
2009. 9. 1. 02:31
- 전날까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상황의 흐름에 따라 무한대로 갈라지는 변수를 전부 잡아낼 수가 없다는 걸 깨닫자 프로세싱 자체가 처리불능이 되어, 파스칼이 말했던 진공 속 무한한 침묵의 두려움이 덮쳤다. 그 감각은 믿기 어려울 만큼 박력이 있어서 지하철에 타고 귀가하는 내내 상체를 가누지 못했다. 사회적 상황에 대한 자각 덕분에 내색하지 않고 버텼지만 말을 할 수도, 울 수도, 설명할 수도 없어 그저 문 손잡이를 꽉 쥐고 굳어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러자 오히려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도 겪지 않는 것을 왜 나만 겪어야 하는지? 오로지 순수한 정신 작용에 의해 불가해한 공포를 겪어야만 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전달할 수도 없고 이해시킬 수도 없는 힘의 파랑 앞에 홀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언제가 되든 충분히 고통스런 체험이다.
어째서 감내해야 하나? 어째서 매번 서투른 감정의 옷자락이 타인의 경계에 스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나? 남들이 상처입을까 두려워하며 사는 것도 이젠 지쳤다. 흔한 농담조차 머뭇거리며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 차라리 인간다운 감정이 모조리 없어진다면 고통 없이 철저하게 잔혹해질 수 있을 텐데! 그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잔혹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바라는 자신이 있다.
...그럼에도 무서운 순간이 잦아들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강하게 자신을 닫아걸고 사람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늘 그렇듯, 불가해하므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내게 가혹한 꼭 그 만큼 타인에게 가혹하다면 누구도 견딜 수 없을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 결국 아침이 왔고 많은 일들을 처리했으며 그동안의 거래처에 최종적으로 인수인계 메일을 보냈다. 언제나 친절하고 신속하게 도와주었던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사실 학사지원부나 기타 업무처를 상대할 때 겪는 다양한 불편을, 개인적으로는 거의 겪어본 적이 없다. 분명 쌀쌀맞다고 했던 근무자에게서 상당한 친절을 경험할 때가 더 많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