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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연

아래와 같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아니, 안 쓰려고 꾹꾹 눌러도 아래 같은 글이 비어져나온다는 게 인지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참 어색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다. 낮에는 매트랩 코드를 짜고 밤에는 사이코메트릭 피팅을 공부하는데, 가끔씩 튀어나오는 저런 식의 비논리적인 문체와 감성은 대단 언밸런스다. 안 어울린다. 좀더 너드같이 전공 외에는 전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깜깜 모른 채 망가져 가며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 된다. 가끔 공부를 하면서 운동도 하고 다른 분야 책도 읽고 책모임도 하고 연애도 하고, 이 모든 걸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게 도리어 부끄러울 때가 있다. 부끄럽다는 건 다시 말해 수치스럽다는 것인데, 결국 수치심은 사회생활의 산물인 것이다. 그냥 그렇다고.



인지를 공부하고 있다는 게 참 한스러울 때가 있다. 아주아주 가끔씩. 사이코피직스와 착시와 공감각을 사람처럼 사랑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요새 존나 트렌디하다는(근데 정말인가?) 뇌/인지과학" 도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구나 싶을 때마다. 해내고 해낼 수 없고의 문제는 아니다. 할 수 있는데도 문제가 된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때가 오면 프로작이라도 한 줌 삼키고 모든 걸 싹 잊으면 좋겠다. 그냥 어서 빨리 속물이 되면 좋겠다. 속물까지는 바라기 힘들더라도 새로 주문한 아디다스 핑크색 삼줄 쓰레빠에 하루의 근심을 잊는 정도로라도 진화하면 좋겠다(참고로 다들 사던 그 쓰레빠 안 샀다. 연구실에 개인물품 안 가져다 놓는다).

그런 쪼끄만 일로는 멍청이의 거대하고 지속적인 우울을 날려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매사에 장단은 있는 법, 시점을 바꾸면 쪼끄만 불행으로는 멍청이의 거대하고 지속적인 환희와 기쁨을 날려 버릴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니 거대한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랑이 없어도 잘들 소비하고 또 벌면서 살아가잖아. 요시나가 후미 가라사대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어. 그런데 사랑이 뭐냐. 의식과 주의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해 분분히 싸우는 학자들이 사랑의 정의를 내리기야 했겠어. 그리고 착한 인지심리학도는 그런 비논리적이고 모호한 언어로 말하면 안 돼요. 말하고 보고 듣고 걷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인지적이어야 합니다. 떽.



...이러니까 블로그를 옮겨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