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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자로서, 알아야만 하는 것 그건, 예전에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 * * * * "약, 6개월간 먹었고, 지금 6개월간 안 먹고 있어." "하지만 약은 꾸준히 먹어줘야 하는데... 물론 부작용이 있어서 힘들겠지만, 중간에 그렇게 끊으면 안 돼." "아니. 약 따위, 먹으나 안 먹으나 똑같던걸? 부작용? 약 먹고 있으면 입이 좀 마르고 가끔 손이 떨리고. 좀 둔해지고. 그게 다였어. 안 먹는 지금은 예전처럼 멀쩡해. 환자를 낫게 하는 건 약이 아니라고." "그건 모르는 일이야. 현재로선 그나마 약물치료가 가장 나은 방법인데다가, 더 중요한 건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잖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우리 대학원 어떤 분도 양극성 장애가 있었는데 리튬을 꾸준히 복용하라는 각서를 안 쓰면 절대 추천서를 안 써준다고, 그래서 각서 받..
차는 왜 막힐까? 감각이 좀 둔한 건지 사고방식이 달랐던 건지는 몰라도, 남들은 다 아는 듯 보이는데 나만 이해가 안 갔던 게 몇 가지 있었다. '차가 왜 막히는가' 라는 질문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 외에 '소설이란 무엇인가' '도시란 무엇인가' 등의 자매품이 있지만 여기서는 소개하지 않는다) 모두들 자연스럽게 얘기한다. 차가 막힌다. 아아, 차가 막히는군요. 귀성길에 사람이 많아서 차가 막혀. 대충 중학생이던가, 고등학생이었던 난 옆에서 묵묵히 들으면서 생각했다: 자동차는 이동 수단이다. 차가 막히는 순간이란 자동차가 이동 수단으로 기능하는 순간이다. 차가 이동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순간은, 그 자동차가 일정량의 벡터를 지니는 순간과 일치한다(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벡터란 개념은 참 깔끔하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여자아이 선언 그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인디안 서머 같은 시월 어느 오후, 난간에 얹어둔 산타페 헤이즐넛 캔을 바라보며. "있잖아. 남자아이의 사랑은 단순해. 단순한 건 나쁘고, 복잡한 건 좋다는 흔한 이분법이 아냐. 좋은 단순함과, 나쁜 단순함이 있어. 좋은 단순함은 여자아이를 예뻐하고, 사랑하고, 귀여워하고, 지켜 주고 싶어하는 것. 나쁜 단순함은 윽박지르고, 짓누르고, 폭력을 휘두르고, 업신여기는 것. 하지만 어느 것이든 단순하긴 마찬가지야. 예전의 나는 그걸 몰랐어. 비난하고 경멸하다가 마음대로 안 되면 포기하고 떠나 버렸어. 좀더 시간이 지나서야, 단순한 것만이 갖는 미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런 단순함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있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서 원하듯이,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문화이론연구 수업에 보낸 편지 (최근 블로그는 자뻑의 기록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오늘은 그 목적과 의도에 충실한 한 편의 포스팅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학우가 푸코의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읽기를 시도하였습니다. 푸코의 이론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정갈하게 작성된 글입니다. 읽어 보시고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수업의 최종목표를 실현한 한 가지 좋은 예를 보여주신 저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ㅇㅇ 드림 후유소요님, 푸코의 글에 대한 완벽한 '공감'을 바탕으로 하지만 푸코를 언급하지 않고서 주변의 일상을 읽고 있네요. 큰 즐거움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두 개의 글 모두 약간만 더 다듬어 고대 신문사에 기고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ㅇㅇ 드림 Subject: ㅇㅇㅇ 선생님께: '감시와 처벌', 그리고 ..
오래된 사물은 버릇처럼 최근 핸드폰을 바꾸었다. 예전 것이 언제 수명이 다할지 몰라, 그래도 저렴할 때 사두자 싶었다. 낡은 핸드폰에선 열쇠고리를 제외하고 변변히 떼어낼 것도 없었다. 이제 폴더를 열면 파란 붓꽃 위에 '개통이 필요합니다' 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그걸 읽을 때마다 하나씩, 상념이 떠올라 맴돈다. 처음 내 것이라 할 만한 폰을 가져본 게 2003년 11월 5일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고사장에서 나온 내게 아버지는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적당히 둥글고 양감이 있는, 싸이언의 새하얀 거울폰이었다. 가장자리의 키패드를 누르자 시간을 알리는 파란 OLED가 거울 속을 가로질러 사라져갔다. 그 파란색에 매료되어 몇 번이고 거듭거듭 눌러보았다. 뿌듯했다. 반짝반짝하고 한손에 쏙 들어오는 핸드폰이 생겼어. 내 거야. ..
인삼과 블루베리 미니샌드 외 몇 가지 관찰 1. 대대적인 인삼 광고. 지난 2월부터 무려 지금까지, 6호선의 광고판은 모조리 홍삼 및 인삼 관련 상품 홍보로 뒤덮였다. 풍기인삼, 황풍정, 김영환 홍삼, 기타 등등. 갑작스럽게 인삼 광고가 불어난 이유는 뭘까? 첫 번째 가설. 공기업인 한국담배인삼공사에서 주관하던 인삼 사업을 올해 초부터 민영화로 풀어 자유경쟁체제로 돌렸기 때문에 그만큼 민간업체 개개의 홍보량이 증가하였다. 그래서 한국담배인삼공사를 검색해 보니, 2002년에 이미 KT&G라는 민영 기업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취업을 타깃으로 하지 않는 자의 일천함-_-;). 갑작스럽게 인삼 관련 광고가 증가한 시점은 2008년 2월 즈음이므로, 또한 전담 공기업의 민영화가 곧 인삼 사업 제반의 민영화는 아닐 것이므로, 일단 이 가설은 ..
공대 남자아이, 문대 여자아이, 그리고 어떤 대화 퍽 오랜만에 공대생 친구 S군과 조우했다. 계절학기가 마악 끝난 7월의 어느 저녁, 친구는 일본라면집의 긴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아. 경영 수업 말야.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아. 음? 어이, 에이플러스 받아올 거라고 그랬잖아. 으... 이번 한번만 봐줘. 실은 말야, 이런 일이 있었다구. "뭐? 선생님한테 '만점짜리 발표문의 완성본이나 예시 같은 게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 저기.. 그거, 잘못하면 엄청 시비조로 들릴 텐데." "...어. 사실 그랬어. (한숨) 안 그래도 공대생 남자 다섯이 우르르 몰려갔으니. 난 좀 말리고 싶었지만 점수가 워낙 엉망이기도 했고 차마." "...하아. 엄청난 일 했네... 여선생님이었잖아. 임팩트가 컸을 텐데." "...하지만 말야..
2008 언어학대회, 첫날 일곱 시에 일어났다. 배치는 우당교양관이었다. 간밤에 일정을 체크하니 세 시 이십 분부터 세션 시작. 인촌기념관의 등록접수는 여덟 시부터였다. 전원 일곱 시에 오라고 했지만, 순순히 따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실행한 지각. 미필적 고의...라기엔 거창하고 실은 그냥 늦잠.-_-; 8시 반께 도착해 명찰과 티셔츠를 받아들었다. 기념 펜이 수북히 쌓여 있길래 녹색과 보라색, 두 개를 골라 가방에 넣었다. 현장은 그야말로 우왕좌왕. 지저분한 건 뒷방에 아무렇게나 숨겨놓았더라. 그러면 그렇지. 가방은 본부 105호실에 던져두고, 주머니에 카메라와 핸드폰을, 만일을 대비한 복사카드와 한 장짜리 연락처 및 지침 페이퍼, USB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방을 나섰다. 왼손에는 핸드북, 오른손엔 펜. 오케이, 롸져. 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