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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그리고 나와 왈츠를 <외전> 삼경이었다. 전야戰野는 고요하지 않았다. 전쟁을 준비하는 지상의 무수한 불빛으로 하늘은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다. 화톳불이 널름거릴 때마다 오가는 병사들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투박하고 살기 어린 소음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녀는 두텁게 깔린 자줏빛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공기는 여전히 건조했다. 내일은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함지불을 등지고 선 그녀의 그림자에 또다른 그림자가 겹쳐왔다. 실루엣은 짙었고, 강건했으며 키가 큰 남자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뭐죠." "그만 막사로 돌아가시지요." "난 여기가 좋아요." "곧 전투가 시작됩니다." "내가 피 냄새를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나요?" "숙녀의 안전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그제서야 그녀는 몸을 돌려 상대를 똑..
3.25일의 꿈 이야기 본래 또 꿈 이야기를 쓸 의도는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인상이 강렬해서 일어나자마자 글로 남겨놓는다. 그리고 이 꿈 때문에 알람도 못듣고 늦잠 잤다. 옌장. 나는 마켓-프랭크포드 블루 라인을 타고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본래는 지하철이지만 마침 지상구간에 올라와 있어, 창 밖으로 낡은 역사나 푸른 하늘이 내다보였다. 마침 역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문으로 들어오려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범한 지하철 풍경 속에 사람들은 평온하게 앉거나 서 있었다. 밖의 한 아주머니가 안쪽의 사람 하나를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요. 얼른 거기서 내려요. 손가락질을 당한 상대는 영문을 모르고 그저 당황스럽게 웃기만..
[단편] 요리는 마법 (3) (1) (2) 오후의 공원은 한산했다. 공원 가운데의 심장숲은 비스듬히 낮아진 햇살을 한몸에 받으며 달콤한 황록색으로 빛났다.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숲. 언저리의 녹색 구릉에서 유모차를 끄는 아주머니 둘이 잡담을 나누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리사는 곧바로 숲 한가운데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향했다. 늘씬하게 뻗은 마가목의 검은 줄기며 연녹색 포플러의 잘생긴 잎사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했다. 문득 무성하던 나무들이 옆으로 갈라지며 빈터가 나왔다. 검은 부엽토가 두툼히 깔린 빈터 한가운데, 조약돌이 줄지어 박혀 둥그스름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아리사는 조약돌 바로 앞까지 다가가 금기를 넘는 수인을 맺은 다음, 폴짝 뛰어들어가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이끼 낀 돌상의 앞이마를 톡톡 두드렸다.“해치(解豸..
[단편] 요리는 마법 (2) (1) 에바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전 중에 다 처리됐어야 할 서류가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신경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렇습니까? 벌써 최외곽의 구시가지 경계를 넘었단 말이죠.”“심각하게 됐네. 이대로라면 위험할 게 분명한데, 아직 아무도 원인을 몰라.”에바는 반투명한 수화기를 꽉 쥐었다. “긴급 투입된 시청 복구 그림반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네만, 퍼져나가는 속도를 간신히 따라잡고 있네. 이런 난감한 일은 기록을 뒤져봐도 시 사상 300년만에 처음이야.”“어떻게든 알려지기 전에 처리해야죠. 시민들의 동요를 막는 게 급선무입니다. 다가오는 봄에 졸업을 앞둔 숙련학교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구요.”“그래서 말인데 자네 직속의 그림반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싶네. 가급적이..
[단편] 요리는 마법 (1) ... 처음에 아무렇게나 제목을 지었더니, 도저히 고쳐지지가 않는군요 OTL 내용이 먼저 있고 제목이 없어 고생한 적은 처음입니다. 두 사람을 붙들고 두 시간 동안 브레인스토밍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일단 갑니다. 나중에 좋은 게 생각나면 고치겠지만서도, 현재로서는 무리. 일단 무리. 소설 전체의 테마: 東京事變- 群靑日和 에바의 테마: Love psychedelico- Free world 아리사의 테마: Shena Ringo Ver.- カープチノ 아줄의 테마: 東京事變- 入水願い 정도의 느낌입니다. 발랄한 느낌으로, 가볍고 소박하게 썼습니다. 뭔가 즐거운 판타지를 써보고 싶었거든요 'ㅂ' 저작권은 제게 귀속되니, 불펌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전 열한 시. 쨍쨍한 초겨울의 햇살이 시립 도서관의..
훈훈한 꿈 드림캐처를 사다 머리맡에 걸었더니, 악몽은 아니지만 이래저래 묘한 꿈을 많이 꾸었다. (그리고 덧붙여 잠이 늘었다) 길가 좌판에서 사왔으니 짝퉁이 아닐까 의심하며, 머리맡에서 빛나는 시리우스를 올려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나는 무도화를 신고 사람이 많은 플로어에 서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누군가가 내게 춤을 청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르고 안경을 쓴 남자였는데, 이제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또렷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단 홀딩을 했는데, 한번도 춰보지 않은 낯선 스텝이라 당황했다. 저, 리드를 못 맞추겠어요, 죄송해요, 라고 했더니 웃지도 않고 말없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보다 신중한 자세로 천천히, 한 발짝씩 스텝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득 기억이 났다. 왈츠였다. 정..
엽편- 그리고 나와 왈츠를 여명이었다. 그녀는 검은 암사슴의 자태로 박명을 등지고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몇 오라기 스미는 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언덕을 걸어올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때가 됐습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한때는 호수처럼 확고했던 두 눈동자가 흡사 고통을 느끼듯 흔들렸다.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은 반듯하게 다물려 있었다. 해뜨기 직전의 불안이 그녀를 베일처럼 감싸고 있었다. "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제 모든 책무는 끝났습니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당신도 아시지 않나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고 무거운 능직의 옷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목에는 검붉은 상흔이 있었다. 속박의 흔적은 길다. 그는 그 상처가 처음 생겼던 순간을 기억했다. 어둠의 시간은 길고 고독의 땅으..
꽃 꿈 이야기 나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배는 고파오는데, 우연히 뽑기 장수를 발견해 두 개를 집어들고 가격을 물었더니 7000원이랜다. 바가지잖아요, 이거.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장수의 뚱한 표정을 외면한 채 되돌아 걸었다. 어깨쯤 오는 나지막한 벽돌과 시멘트 담벼락이 이어지는 골목길 위의 하늘은, 청명한 파란색이었다. 오동나무에 꽃이 피었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크고 아름다운 가지를 드리운 나무는 잎도 없이 꽃술 근처가 짙은 빨강으로 물든 샛노란 꽃무더기를, 산방꽃차례로 달고 있었다. 죽 스무 발짝쯤 걸어가다가 아무래도 잘못 든 것 같아 다시 돌아드니, 뽑기 장사 앞에 아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어쩐지 그 앞을 지나갈 자신이 없어 아이들이 나오는 옆 골목으로 꺾었다. 놀랍게도 그 길은 성북역으로 통하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