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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象

2006. 2. 15. 오후

냄비에 불을 올렸다. 계란 두 개를 깨서 sunny-side up으로 바닥이 갈색이 되게 지지고 있을 때쯤 주전자에서 김이 올랐다. 홍차에 달걀 프라이에 만두졸임으로 점심을 먹는다. 창밖에는 아파트의 뾰족한 지붕과 흐린 하늘. 반쯤 비현실적이라 좋아하는 풍경이다. 얼마 안 있어 이사 가면, 이것도 다시 보기 힘들겠지. 태어나서 자란 집을 처음 떠날 때는 엄청나게 울었다. 체중도 한 달 사이에 8kg나 불었다. 두 번째로 이사 올 때는 첫날만 좀 울고 금방 다음날부터 아무렇지 않아졌다. 이번엔 아마 우는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으로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한 곳도- 새 집이 구해지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는 수많은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알아 버렸으니. 많은 것들이 이별에 이별을 거듭하고, 놀랍게도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이대로 죽을 때까지 영원히 땅 위를 헤매면서 살게 되겠지. 좀더 나은 곳을 찾아서. 그다지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유익한 체험.

로만쉐이드를 처음 건 날, 일어나자마자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놀랐다. 베란다의 주홍색 불은 쉐이드에 가려 명도가 확 낮아지고 말았다. 아무리 사소한 변화라도 주위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고 만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일들. 그 일들이 모여 만든 세계.

정서와 기분의 차이를 배운 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최근의 내가 빈번하게 느끼는 슬픔은 기분이 아닌 정서emotion다. 매 순간순간 자극에 의해 촉발되고 의식화되는 일련의 에피소드. 일상을 지배하는 무기력함이나 우울mood와는 거리가 있는 슬픔. 번갯불이나 등줄기로 쏟아지는 찬물 같은 강렬한 한 획stroke. 자기연민이나 자학을 통해 느끼는 쾌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직한 아픔. 오롯이 고통에만 기인한 고통.

어쨌건 여기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차마 버리지 못한 감정의 커다란 덩어리가 여전히 전의식pre-consciousness에 존재한다. 나는 그 감정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회피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의식에 통째로 띄워 두기엔 너무 아파서, 살짝 밀어내려 단단히 얼려 두었다. 어디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가슴이 사무치게 아픈 건 눌러 둔 감정이 때때로 저도 모르게 솟구치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을 눈 뜨고 24시간 내내 받아들이기엔 그렇게 강인하지 않아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공부에 몰두하면서- 혹은 이렇게 글로 풀어냄으로써 엄습하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는다. 그래, 생활. 그때처럼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씩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지금은 조금 더 익숙해졌다. 수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능숙해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때때로 땅 위에 존재하는 지형지물을 싹 걷어내 버린, 순전한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밝은 하늘에서 싸락눈이 흩날리고 있다. 나는 어디로도 걸어갈 수 있다. 세상은 열려 있고, 자유롭다. 동시에 황량하고, 나 외에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많아도 사랑할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일은 참으로 괴롭고도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