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교수님과의 관계. 결혼은 안 했지만 이게 바로 결혼생활이구나 싶다.
1단계: 상대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와 열의를 갖고 임한다
2단계: 상대가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며 환상이 꺠진다
3단계: 감정적 번아웃 모드
4단계: 식어서 현실을 인정하고 거리 두기
여기까지 생각하니 정말 세간에서 말하는 그거랑 닮아 있잖아(웃음). 사실 생각해 보면 남자친구보다 더 자주 보는 관계다. 그래도 2-3단계에서 파탄이 안 나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노력과 책임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좋은 사람이라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관계란 분명히 있다. 화법이나 반응 패턴이 달라서 소통단계부터 오해가 생기면 풀기가 참 어렵다. 해명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오해가 거듭제곱으로 늘어나게 되거든.
그러나 그럼에도- 어쨌든 노력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함께 일하고 있으니까. 감정이 상한다고 그만두고 나가면/내보내면 결과적으로 lose-lose일 뿐이다. 비교적 현실적인 이유다. 둘째, 상대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느끼니까. 왜 그분은 그렇게도 날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건가, 싶어 죽겠다가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많이 배려해 주시는구나, 싶은 포인트가 느껴진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라고 해서 이해 안 되는 상대를 품고 가는 게 어디 쉬운가. 섭섭함과 배려가 한데 뒤섞인 무언가가 가끔씩, 관계의 라그랑지안 포인트를 넘어 전해져 온다.
언젠가 1:1로 사케 한 잔 하며 선생님이 그러셨다. '솔직히 니 취향을 알았더라면 안 뽑고 다른 선생에게 넘겼어요. 그러니까 니가 지금까지 일 열심히 안 했으면 국물도 없었어요.' 최근에도 한번 그러셨다. '후유는 어떤 분야를 가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을 하겠지만, ...' 그러니까 결국 선생님도 다 아시는 거다. 어느 정도 포기하고 손에서 놓을 준비를 하시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키우는데 맘 좋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여러모로 챙겨 주신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열심히 해야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는 수밖에. 랩을 위해서도 하고 내 공부를 위해서도 해야지, 싶으면서 갑갑한 와중에 맘이 짠한지 애틋한지, 여하튼 그렇다. 그걸 통상의 언어로 미운 정이 쌓인다고 하나. 그런 미운 정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이 다이내믹으로 가득찬 애증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겠는가.
사실 그만둘 기회는 몇 번 있었다. 지난 여름에 다 접고 유학 준비해서 어플라이할 수도 있었다. 안 하겠다고 먼저 말씀드렸다. 정 원하면 랩을 옮겨도 괜찮다는 말도 들었다. 옮기지 않겠다고 했다. 이글루에 대고 일년 내내 괴로워한 주제에 웃기지만, 그냥 그렇게 놔 버릴 수는 없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설명 못 하겠지만.
형태는 다르겠지만 서로 다른 인간이 일대일로 가까워진다는 게 그렇지 싶다. 나중에 결혼할 일이 있다면 결혼생활도 비슷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