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근에 떠오른, 사람에 대한 짧은 단상 몇 개

- 종종 단정적으로 쓰인 글이나 주장을 본다. 확신에 찬 어조 때문에 이미 검증이 완료된 내적 결과물을 타인에게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 그 글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미완성된 자기 자신인 경우가 있다. 글로써 표현한 지향점에 안정적으로 부합하지 못하는 현재의 자신에게 확신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 이유는 모르겠으나, 극과 극의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A의 가치가 B의 무가치로, C의 덕목이 D의 부덕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가장 좋은 위치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친우 모두 내게는 가치로운 사람이자 공감 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에, 상이한 두 개체간에 발생하는 비언어적인 괴리의 정체에 대해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무거운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다. 서로 다른 둘을 한 자리에 놓고 융화시킬 수 있겠는가의 여부 역시, 별개의 문제다. 간극을 좁힐 수도 그 대척점을 이해하게끔 만들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내버려 둘 뿐이다.


- 현명해지는 것을 자신의 지향점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 만일 본인이 그렇다면, 현명해 '보이고 싶은 것'과, 현명해지고 싶은 것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단지 외적인 장식고리로서 '현명함'을 추구한다면 허영에 불과할 것이고, 외적인 시선을 배제한 채 현명함'이라 칭할 수 있을 만한 내적 성숙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순간 단어는 의미를 잃을 것이다(개인적으로는 '현명해지는 것'을 이상으로 취급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피상적인 용어가 주는 감상은 종종 매력적이다. 후자를 위해서라면 그러한 매력은 과감하게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 내적 성숙을 획득하는 과정 역시 무수한 실질적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의 결함을 파악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인식력을 끌어올리는 연습이다.


-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선 관대하다.



- 종종, 눈앞의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주게 된다. 그 결과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거나, 낫게 하거나, 위안을 주는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다만, 나는 내 한계를 아는 데 반해 상대는 내 한계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 두렵다. 좋은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라면, 언젠가 맞닥뜨리는 한계- 잠긴 수도꼭지 앞에서 실망하거나 분노할 일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슬프기 그지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게 될 것 역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