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페이퍼의 세컨드 드래프트를 다시 써갔다. 첫줄부터 걸렸다. 두번째 줄도 또 걸렸다. 세번째 줄도 걸렸다. 나쁘다, 교수! 거긴 체크도 안 해줬잖아! 결국 검토 시간 20분을 훌쩍 넘겨, 내일 다시 오기로 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음 애에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별말않고 째려보더니 그냥 들어갔다.
아, 마음이 휑해졌다. 이래서는 첫 드래프트에서 받은 B플러스를 능가하긴... 무리야.
왜 째려보니. 나는 너희들 같은 네이티브가 아닌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그 말, 그게 제일 싫어.
너희들이 어떤 어려운 소릴 해도 다 알아들을 수는 있는데 말로는 못해. 한국어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지적인 대화를 너희들이 알아듣게는 못해. 소설을 읽고 질문지에 답을 하면 생각나는 게 산더미인데 반도 전달할 수 없어.
펜 정규 학생이 아니라 인터내셔널이라고 말했을 때 변하던 태도라든가, 잘 말하다 한순간 말이 꼬였을 때 안쓰럽다는 듯이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던 은행 직원의 표정, 그런저런 자잘한 것들이 꼭 이런 순간에 한꺼번에 떠올라 울컥한다. 그래, 나는 펜에 질릴 정도로 널린, 시시때때로 영어가 막히는 그저그런 동양인들 중 하나일 뿐인걸. 우리 학교에 날라리 고등학생들이 와서 시끄럽게 구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보일까나. 일부러 다가가서 먼저 말을 걸어도 친구가 되기 어렵다. 친절한 아이도 있지만,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면 별수없이 당황하게 된다. 말 잘 통하는 다른 아이들이 있는데 굳이 내가 내미는 손 같은 걸 잡을 필요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때 살다 와서 영어를 잘하던 아이들도 결국엔 다들 한국인들과 어울렸던 건. 넌 그렇게 영어를 잘하면서 왜 네이티브랑 놀지 않니, 라고 물었을 때 그애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래서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았다. 영어는 못해도 지적인 수준에서는 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호의적인 시선이나 친절함 따위 어차피 기대하지 않으니까 눈앞의 너희들을 이기기만 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와서 놀기만 하는 한국인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이었을까. 같이 온 아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다른 인터내셔널들과 제일 많이 어울렸지만, 결국 다들 돌아가 버렸다.
열심히 했고, 많이 배웠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였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지지 않고 환경에 지지 않고, 일정한 수준으로 궤도를 유지해 나갈 때의 충족감, 그게 일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도구였다. 의욕도 동기도 거기에서 나왔다. 최근 날이 섰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도 그럴지 모르겠다. 매일 날을 세운 채 살았으니. 밤길도 워낙 위험한 곳이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포스를 눈에 담고 다녔다. 사람을 만나고, 춤을 추러 가고, 행사에 참석하고, 실험에 자원하고, 그런 여가생활도 전부, 할 수 있는 걸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에서 수행해 왔다.
문득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된 건 그저.. 지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데 지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동기만큼 강력한 건 없으니까.
스페인에 가서야 처음으로 마음이 얼마나 얼어붙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이 참 상냥하구나. 스페인어를 못해도 웃는 얼굴로 봐 주는구나. 호스텔에서 만났던 다른 나라 학생들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에, 대등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그때처럼 영어가 자연스럽고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이제 그만 즐겁고 싶다.
삶을 즐기고 싶어, 라고 아주 오랜만에 생각했다.
그동안 많이 변했으니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이제는 조금 즐거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자 문득 의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노다메를 보았다. 천재란 그런 게 아닐까. 자신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타인을 즐겁게 하는 능력. 더 높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매혹시키는 힘. 그런 힘을 발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께 그려간 퍼스펙티브 드로잉을 보고, 미술 선생님이 fascinating, 이라고 말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칭찬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어제는 내 키보다 더 큰 판에, 꼭 내 턱까지 오는 길이의 종이에 목탄화를 완성했다.
꼭 열한 시간 걸렸다.
이젠 즐겁게, 낙서하듯이 평소에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주말엔 구겐하임을 다녀오고 싶다.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느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친구들도 불러내서, 영화도 보러 가고...
집 앞의 Podd에도 가서 술 한잔 하고 싶고.
Macy에 가서 쇼핑도 하고 싶고.
가면 수영모를 사와서 수영을 다녀야겠다.
벛꽃이 필 땐 워싱턴도 가보고 싶어.
....
근데 ㅅㅂ... 아키올로지 숙제 또 나왔네?!?!
그래도 영화는 보러 갈거야!!!! 주말에 뉴욕도 갈거고!!!
아, 마음이 휑해졌다. 이래서는 첫 드래프트에서 받은 B플러스를 능가하긴... 무리야.
왜 째려보니. 나는 너희들 같은 네이티브가 아닌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그 말, 그게 제일 싫어.
너희들이 어떤 어려운 소릴 해도 다 알아들을 수는 있는데 말로는 못해. 한국어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지적인 대화를 너희들이 알아듣게는 못해. 소설을 읽고 질문지에 답을 하면 생각나는 게 산더미인데 반도 전달할 수 없어.
펜 정규 학생이 아니라 인터내셔널이라고 말했을 때 변하던 태도라든가, 잘 말하다 한순간 말이 꼬였을 때 안쓰럽다는 듯이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던 은행 직원의 표정, 그런저런 자잘한 것들이 꼭 이런 순간에 한꺼번에 떠올라 울컥한다. 그래, 나는 펜에 질릴 정도로 널린, 시시때때로 영어가 막히는 그저그런 동양인들 중 하나일 뿐인걸. 우리 학교에 날라리 고등학생들이 와서 시끄럽게 구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보일까나. 일부러 다가가서 먼저 말을 걸어도 친구가 되기 어렵다. 친절한 아이도 있지만,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면 별수없이 당황하게 된다. 말 잘 통하는 다른 아이들이 있는데 굳이 내가 내미는 손 같은 걸 잡을 필요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때 살다 와서 영어를 잘하던 아이들도 결국엔 다들 한국인들과 어울렸던 건. 넌 그렇게 영어를 잘하면서 왜 네이티브랑 놀지 않니, 라고 물었을 때 그애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래서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았다. 영어는 못해도 지적인 수준에서는 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호의적인 시선이나 친절함 따위 어차피 기대하지 않으니까 눈앞의 너희들을 이기기만 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와서 놀기만 하는 한국인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이었을까. 같이 온 아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다른 인터내셔널들과 제일 많이 어울렸지만, 결국 다들 돌아가 버렸다.
열심히 했고, 많이 배웠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였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지지 않고 환경에 지지 않고, 일정한 수준으로 궤도를 유지해 나갈 때의 충족감, 그게 일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도구였다. 의욕도 동기도 거기에서 나왔다. 최근 날이 섰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도 그럴지 모르겠다. 매일 날을 세운 채 살았으니. 밤길도 워낙 위험한 곳이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포스를 눈에 담고 다녔다. 사람을 만나고, 춤을 추러 가고, 행사에 참석하고, 실험에 자원하고, 그런 여가생활도 전부, 할 수 있는 걸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에서 수행해 왔다.
문득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된 건 그저.. 지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데 지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동기만큼 강력한 건 없으니까.
스페인에 가서야 처음으로 마음이 얼마나 얼어붙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이 참 상냥하구나. 스페인어를 못해도 웃는 얼굴로 봐 주는구나. 호스텔에서 만났던 다른 나라 학생들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에, 대등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그때처럼 영어가 자연스럽고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이제 그만 즐겁고 싶다.
삶을 즐기고 싶어, 라고 아주 오랜만에 생각했다.
그동안 많이 변했으니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이제는 조금 즐거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자 문득 의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노다메를 보았다. 천재란 그런 게 아닐까. 자신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타인을 즐겁게 하는 능력. 더 높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매혹시키는 힘. 그런 힘을 발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께 그려간 퍼스펙티브 드로잉을 보고, 미술 선생님이 fascinating, 이라고 말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칭찬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어제는 내 키보다 더 큰 판에, 꼭 내 턱까지 오는 길이의 종이에 목탄화를 완성했다.
꼭 열한 시간 걸렸다.
이젠 즐겁게, 낙서하듯이 평소에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주말엔 구겐하임을 다녀오고 싶다.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느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친구들도 불러내서, 영화도 보러 가고...
집 앞의 Podd에도 가서 술 한잔 하고 싶고.
Macy에 가서 쇼핑도 하고 싶고.
가면 수영모를 사와서 수영을 다녀야겠다.
벛꽃이 필 땐 워싱턴도 가보고 싶어.
....
근데 ㅅㅂ... 아키올로지 숙제 또 나왔네?!?!
그래도 영화는 보러 갈거야!!!! 주말에 뉴욕도 갈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