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둘이 있다. 큰애가 일곱 살이고 작은 애가 이제 두 살. 사촌 내외분이 다들 신앙인이라 교회 오후 예배에 애기들까지 다 함께 따라갔다. 늦은 점심을 얻어먹고, 조카 애기들은 제멋대로 건물을 빠져나와 뒤뜰로 달려갔다. 나도 함께 느긋하게 뒤따라 걸어갔다. 늦은 햇살에, 잔디가 가득한 뜨락은 잘 다듬은 녹주석의 맑은 빛이 감돌았다. 점점이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가느다란 흙길을 따라 녹색의 벌판과 어디로 이어질지 모를 푸른 활엽수 숲이 서녘을 등지고 밝게 빛났다. 큰애에게 홀씨가 잘 익은 민들레를 따서 주었더니 금세 후후 불면서 즐거워했다. 작은 녀석은 제 또래 애들을 금방 찾아내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파트 옥상에서 본 무지개, 여름날 빈터의 숲, 노인정 앞뜰에 피어 있던 칸나, 어린 시절을 감싼 사소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추억이 된다. 추억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든다. 아름답고 맑은 환경을 매일 접하면서, 원칙을 아는 성숙한 부모 아래서 자라는 어린 것들. 큰애와 작은애는 사이좋게 어울려 놀고, 때로 말다툼도 하지만 서로 악을 지르며 싸우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서로 갖고 싶은 게 있어 실랑이가 생기면 한 쪽이 먼저 양보한다. stop it이란 말로 싸움이 될 수 있는 다툼이 멈춘다. 정신없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도, 집에 가자고 타이르는 한 마디에 금방 웃으면서 말을 듣는다. 큰애는 작은애를 귀여워하고, 작은애는 큰애를 꼭꼭 누나라고 부른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는 험한 말이라도 잘못 배울까봐 더욱 말조심을 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논리는 이미 교재에서 수도 없이 보고 강의로도 들었지만, 조카들을 지켜보면서 새삼 피부로 느낀다. 지금의 낮잠과 오후의 케이크, 수영과 교회 예배의 행복한 기억이 어린 시절의 디딤돌이 되어 한 인간을 완성할 것이다. 물론 자크 프레베르의 싯귀처럼 세상은 넘쳐흐르는 끔찍한 불행과 고문자들과 나으리들로 가득하고, 그 아이들도 자라며 그런 현실을 맛보게 될 날이 결국 올 것임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어린 시절을 지탱해 온 사랑과 신뢰가, 바로 그 때가 닥쳐왔을 때 쉽사리 일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 내적 영력이 되어 줄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이 자라며 맞닥뜨릴 미래가 더욱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그런 환경을 위해 부모가 기울이는 노력은 또한 어떨지. 그 책임은 과연 어떠한 무게일지. 아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내외분 역시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직접적인 애정 표현은 오가지 않아도 관계에서 퍼지는 따스한 기류가 집 안을 채우고 있다. 본래 어린애를 좋아하지 않는 자신으로서도 최선을 다해 돌봐 주고 싶을 정도로, 안온한 따스함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긍정적인 측면이 가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겠지.
성숙한 관계와 가정을 지켜보는 일은 자신마저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가능하면 어서 어른이 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다. 지금도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종일 흐트러진 집안과 아침부터 치우지 못한 채 내버려진 설거지, 두 어린애의 정신없는 쇄도를 지켜보고 있자면 부모로서의 처지와 책임이 섣불리 감당하겠다고 나서기 어려울 정도로 막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도 두 분은 아이를 기르면서, 서로의 관계를 지키면서 자신들의 일도 동시에 해 나가고 있다. 그것이 보통 직무가 아닌 학계의 그것임을 감안할 때, 과연 어떤 수준의 역량이 필요할지- 아직 어린 나로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미 막연하다.
종종 느끼는 자신은 참 되어먹지 못한 인간이라 이럴 때마다 마음에 와닿는 무게가 심히 무겁다. 신앙인은 일단 아니고, 모성본능도 의심스럽고(차라리 약하고 작은 것에 대한 책임감이라면 모를까) 일과 가정 중 포기하라면 가정 쪽을 기꺼이 포기할 정도로 일 쪽의 각오가 서 있고, 입도 험한데다 애인도 파란도 심히 많았었다. 비뚤어진 생각과 거짓말은 셀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런 내가 훗날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두는 일이 생긴다면, 그 아이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임을, 부모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줄 수 있을 정도로 균형잡힌 인간일 수 있을지. 그렇게 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고민하고 판단해야 할지. 현재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지켜보며, 극단에 위치한 두 가치가 내면에서 충돌하는 것을 언제까지 감내할지. 배덕이나 악덕이 주는 쾌락과, 경건함과 절제에서 오는 기쁨을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이 결국엔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
큰고모의 환갑 때 친척들이 다 같이 모였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목사로 서품을 받은 막내사촌이 대표로 일어나 감사와 축하의 말을 전했다. 오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고모의 눈가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책임져야 할 어린 것들을 이끌고 인내의 시간을 겪어 온 사람이 마침내 받는 보상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그저 그런 걸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싶다.
P.s 하지만 사실은 내가 애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애들이 나와 놀아주고 있을지도(...) 안습.
P.s.s 내 English fluency의 수준은 7살짜리 애와 동갑이란 점을 깨닫고 좌절 OTL
물론 보카주머니야 내 쪽이 크기야 하겠지만서도, 안습 안습.
저도 모르게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파트 옥상에서 본 무지개, 여름날 빈터의 숲, 노인정 앞뜰에 피어 있던 칸나, 어린 시절을 감싼 사소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추억이 된다. 추억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든다. 아름답고 맑은 환경을 매일 접하면서, 원칙을 아는 성숙한 부모 아래서 자라는 어린 것들. 큰애와 작은애는 사이좋게 어울려 놀고, 때로 말다툼도 하지만 서로 악을 지르며 싸우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서로 갖고 싶은 게 있어 실랑이가 생기면 한 쪽이 먼저 양보한다. stop it이란 말로 싸움이 될 수 있는 다툼이 멈춘다. 정신없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도, 집에 가자고 타이르는 한 마디에 금방 웃으면서 말을 듣는다. 큰애는 작은애를 귀여워하고, 작은애는 큰애를 꼭꼭 누나라고 부른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는 험한 말이라도 잘못 배울까봐 더욱 말조심을 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논리는 이미 교재에서 수도 없이 보고 강의로도 들었지만, 조카들을 지켜보면서 새삼 피부로 느낀다. 지금의 낮잠과 오후의 케이크, 수영과 교회 예배의 행복한 기억이 어린 시절의 디딤돌이 되어 한 인간을 완성할 것이다. 물론 자크 프레베르의 싯귀처럼 세상은 넘쳐흐르는 끔찍한 불행과 고문자들과 나으리들로 가득하고, 그 아이들도 자라며 그런 현실을 맛보게 될 날이 결국 올 것임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어린 시절을 지탱해 온 사랑과 신뢰가, 바로 그 때가 닥쳐왔을 때 쉽사리 일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 내적 영력이 되어 줄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이 자라며 맞닥뜨릴 미래가 더욱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그런 환경을 위해 부모가 기울이는 노력은 또한 어떨지. 그 책임은 과연 어떠한 무게일지. 아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내외분 역시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직접적인 애정 표현은 오가지 않아도 관계에서 퍼지는 따스한 기류가 집 안을 채우고 있다. 본래 어린애를 좋아하지 않는 자신으로서도 최선을 다해 돌봐 주고 싶을 정도로, 안온한 따스함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긍정적인 측면이 가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겠지.
성숙한 관계와 가정을 지켜보는 일은 자신마저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가능하면 어서 어른이 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다. 지금도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종일 흐트러진 집안과 아침부터 치우지 못한 채 내버려진 설거지, 두 어린애의 정신없는 쇄도를 지켜보고 있자면 부모로서의 처지와 책임이 섣불리 감당하겠다고 나서기 어려울 정도로 막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도 두 분은 아이를 기르면서, 서로의 관계를 지키면서 자신들의 일도 동시에 해 나가고 있다. 그것이 보통 직무가 아닌 학계의 그것임을 감안할 때, 과연 어떤 수준의 역량이 필요할지- 아직 어린 나로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미 막연하다.
종종 느끼는 자신은 참 되어먹지 못한 인간이라 이럴 때마다 마음에 와닿는 무게가 심히 무겁다. 신앙인은 일단 아니고, 모성본능도 의심스럽고(차라리 약하고 작은 것에 대한 책임감이라면 모를까) 일과 가정 중 포기하라면 가정 쪽을 기꺼이 포기할 정도로 일 쪽의 각오가 서 있고, 입도 험한데다 애인도 파란도 심히 많았었다. 비뚤어진 생각과 거짓말은 셀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런 내가 훗날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두는 일이 생긴다면, 그 아이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임을, 부모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줄 수 있을 정도로 균형잡힌 인간일 수 있을지. 그렇게 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고민하고 판단해야 할지. 현재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지켜보며, 극단에 위치한 두 가치가 내면에서 충돌하는 것을 언제까지 감내할지. 배덕이나 악덕이 주는 쾌락과, 경건함과 절제에서 오는 기쁨을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이 결국엔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
큰고모의 환갑 때 친척들이 다 같이 모였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목사로 서품을 받은 막내사촌이 대표로 일어나 감사와 축하의 말을 전했다. 오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고모의 눈가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책임져야 할 어린 것들을 이끌고 인내의 시간을 겪어 온 사람이 마침내 받는 보상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그저 그런 걸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싶다.
P.s 하지만 사실은 내가 애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애들이 나와 놀아주고 있을지도(...) 안습.
P.s.s 내 English fluency의 수준은 7살짜리 애와 동갑이란 점을 깨닫고 좌절 OTL
물론 보카주머니야 내 쪽이 크기야 하겠지만서도, 안습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