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총결산에 간략하게 적긴 했지만, 역시 결과만을 적고 끝내기엔 무언가 아쉬워서.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초입. 왼편에는 보드와 자가 어지럽게 쌓여 있다. 전등도 잡동사니도 모두 한가득. 고물 카세트도 두 대나 있어서 종종 작업을 하는 아이들이 음악을 켜놓는다. 종종 엿들으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잘 뒤져보면 어둠의 심장이나 바가바드 기타 같은 책도 굴러나온다.
새벽 두 시, 비에 흐뭇이 젖은 한밤의 거리. 텅 빈 스튜디오에 혼자 앉아 멍하니 거울에 비춘 전등 불빛을 보노라면 무섭다기보다 호젓한 심사가 앞선다.
절반쯤 완성했을 무렵. 이때까지 열다섯 시간 정도 투자했던 것 같다. 비가 오니 날씨가 아주 쌀쌀해져서 챙겨온 코트가 의자에 대롱대롱. 커다란 우산은 모자를 귀까지 눌러쓰고 나가려는 내게 나오코가 키요츠케테, 한 마디를 담아 건네주었던 것.
이젤과 의자들. 이젤은 상하 고정이 가능하고 각도까지 조정할 수 있게 만들어진 녀석이다. 큰 그림을 그릴 때 너무 뒤로 기울어져 있으면 사람이 위태로워지므로 수직에 가깝게 바를 세운다. 빛에 관해 공부할 때 쓰이는 램프는 큰 집게가 달려 있어 이젤에 걸 수 있다.
목탄으로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그러다 씻어내기를 네다섯 번쯤 반복하니 지문이 얇아지면서 손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비로소 아르테미스처럼 아리땁던 선생님의 손이 왜 그렇게 거칠고 단단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손끝에도 지문이 없었다.
어쩐지 이걸 공개하면 시집 못갈 것 같은 기분이지만...-_-; 하지만 하단 광원은 꼭 도전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냥 얼굴은 희생시켰다.-_-;;;;; 하지만 앞으로의 사진에서 얼굴은 클로즈업 안할거다.-_-;;;;
이것은 낡은 삼면 온실 속에서 등불과 함께 위를 올려다보는 백귀야행의 정령, 그리고 그 유리창 너머 바깥에서 마악 귀신불을 발견한 자신이다. 테크닉면에서는 1. 하단에 광원이 있을 때의 효과, 2. 광원 안팎의 유리에 비친(혹은 내다보이는) 형상 표현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 보고자 했다. 다소 난이도가 있지만 그만큼 재미있을 것 같았고, 하면서도 꽤나 즐거웠다.
내용면에서는 이질적인 두 존재의 만남...이라고 쓰면 너무 거창해 보인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만나기 바로 직전, 긴장된 순간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놀란 내 시선은 (실제로는 조금 bit-off로 지적당했다) 옆의 귀신불에 향해 있고, 그 다음 순간 아래쪽의 정령으로 옮겨갈 것이다. 정령은 눈앞에 나타난 이상한 것을 감지하고 마악 고개를 들려 하고 있다. 옆의 양 유리를 잇는 나무기둥은 대각선으로 이어진(혹은 이어질) 시선의 흐름을 보완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주기 위해 살짝 대각선으로 기울였다.
내부 광원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비단의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매끄럽진 않아 아쉽다. 마지막에 살짝 단풍잎을 그려넣어 주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어두운 나방은 전구의 표면에 종이를 붙여 가며 관찰해서 그린 것. 원래 정령이 유리에 비치...지는 않지만, 그림의 효과를 위해 그냥 패스.
가장 문제는 내가 밖에 있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였다. 티슈로 닦아내고 지우개로 각을 내 전반적으로 흐리게 만들긴 했지만, 뭔가 역부족이었다. 밤에 전등을 끌고 나가서 유리 밖에 청소기를 세워 놓고 지켜봤는데, 깨끗한 유리로서는 도저히 안팎을 한눈에 구분짓게 만들 방법이 없었다. 우연히 낸 지문에 불빛이 비치자 비로소 안과 밖이 달라 보였다. (물론 땟자국에도 빛이 반사되어 밝게 보인다) 그래서 만들어낸 지문 자국들과 땟국물들. 광원의 빛이 닿는 부분은 검댕이며 자국을 막론하고 전부 하얗다.
뭉글뭉글한 검은 것은 검댕으로, 덩어리진 효과를 주기 위해 쓱쓱 칠하고 내버려 두었다. 넓은 면적은 티슈가 없었으면 손가락이 완전히 아작났을 거다.-_-; 그래도 정교한 부분 처리는 역시 손끝처럼 믿을 만한 게 없더라. 연한 명암은 손에 남은 목탄을 쓰거나, 혹은 손끝에 문질러 살살 펴 발랐다. 나방의 각도도 나름 신경을 기울인 것 중 하나. 나중에 선생님이 'These moths give rhythm and orchestration' 이라고 하며 그림에서 가장 잘 된 부분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거울 한번 보고, 그림 한번 보면서 그린 왼손. 나중에 팔이 저려서 혼났다. 가장 어려웠고 가장 공들인 부분. 흐릿하게 만들 때는 안구에 습기가 찼다.
하단부의 전체형상. 상단부는.....안 올릴 거다.ㅠ_ㅠ 밤에 불켜놓고 있는 그대로 그렸더니 많이 추함;;
크리틱 당일날 아침까지 손을 보았다. 11시가 마감. 선생님이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안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들어와 그림을 전부 벽에 걸라고 활기차게 명령을 내렸다. 뉴욕에서 비평가로 활동하는 자기 친구도 함께 데려와서는, 다같이 나란히 벽을 향해 앉아 한 명씩 나가서 그림 설명을 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아이 중에 새삼 지나가 떠오른다. 귀여운 미소를 지닌 차이니즈 아메리칸이었다. 재잘재잘 말하는 게 조금 알아듣기 어렵긴 했지만, 말도 잘 못하는데 싫증 한번 내지 않고 매번 즐겁게 점심도 같이 먹고 놀아 주었다. 나중엔 펜카드에 밀이 잔뜩 남았다고, 고맙게도 몇 번이나 식사대접을 해주었다. 내가 밥을 사준다고 할 때마다 매번 거절하기만 해서, 아직도 미안한 맘이 한가득. 형상을 따는 건 다소 서툴렀지만,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강점인 게 나와는 정반대였다. 덕분에 실력 면에서도 좋은 라이벌이어서, 매번 서로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돌아서서 미진한 점을 고쳐나가곤 했다. 둘이 밤새워 스튜디오에서 파이널 과제를 할 때 얼굴에 목탄을 바르고 익살을 부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업도 과제도 할 땐 열심히 했지만 중간에 서너 번씩 지각했던 나와는 달리 한결같이 성실했던, 좋은 친구였다. 파이널 과제 역시 물론이고. 찍어오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타이밍을 놓쳤다.
그와는 반대로, 조이스라는 사내녀석은 평소에 수시로 수업을 빠질 뿐더러 최소 25시간을 투자하라고 한 파이널 과제도 그 당주까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 아이디어에 관한 설명은 우리 중에서 가장 잘 했지만 정작 실적이 부족했달까. 결국 당일날은 스케치 끄적인 것에 불과한 백지를 걸어야 했다. 아무도 그것에 관해 지적하거나 뭐라하지 않았고, 선생님은 차분하게 그림의 장단에 대해서만 설명을 했지만- 선생님이 마지막에 던진 한 마디처럼, "I'll say nothing, because you just feel it in your blood,", 그 본인이 가장 잘 알았으리라. 그 자리 자체가 이미 불성실함에 대한 대가라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키보다 더 큰 그림을 완성해서 앞에 두고 있으니 어쩐지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앞에 나가서 서툰 영어로 열심히설명을 했다. 뭐라뭐라 굉장히 빠르게 말을 많이 해서 전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왠지 칭찬해주는 것만은 금세 알겠더라.;; 칭찬이 아니라도 아마 좋았을 것 같다. 나름 노력을 다해 완성한 작품을 누군가가 둘러서서 보아 주는 것만으로도 무지하게 기뻤으니까.
나왔을 때는 해가 명랑하게도 새파란 중천에 높이 솟아 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그러니까, 점수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이걸로 충분하니까. 공구가방을 꼭 쥔 채 마악 바뀌는 신호등을 가로질러 뛰어가던 그 순간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은 낡은 삼면 온실 속에서 등불과 함께 위를 올려다보는 백귀야행의 정령, 그리고 그 유리창 너머 바깥에서 마악 귀신불을 발견한 자신이다. 테크닉면에서는 1. 하단에 광원이 있을 때의 효과, 2. 광원 안팎의 유리에 비친(혹은 내다보이는) 형상 표현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 보고자 했다. 다소 난이도가 있지만 그만큼 재미있을 것 같았고, 하면서도 꽤나 즐거웠다.
내용면에서는 이질적인 두 존재의 만남...이라고 쓰면 너무 거창해 보인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만나기 바로 직전, 긴장된 순간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놀란 내 시선은 (실제로는 조금 bit-off로 지적당했다) 옆의 귀신불에 향해 있고, 그 다음 순간 아래쪽의 정령으로 옮겨갈 것이다. 정령은 눈앞에 나타난 이상한 것을 감지하고 마악 고개를 들려 하고 있다. 옆의 양 유리를 잇는 나무기둥은 대각선으로 이어진(혹은 이어질) 시선의 흐름을 보완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주기 위해 살짝 대각선으로 기울였다.





크리틱 당일날 아침까지 손을 보았다. 11시가 마감. 선생님이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안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들어와 그림을 전부 벽에 걸라고 활기차게 명령을 내렸다. 뉴욕에서 비평가로 활동하는 자기 친구도 함께 데려와서는, 다같이 나란히 벽을 향해 앉아 한 명씩 나가서 그림 설명을 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아이 중에 새삼 지나가 떠오른다. 귀여운 미소를 지닌 차이니즈 아메리칸이었다. 재잘재잘 말하는 게 조금 알아듣기 어렵긴 했지만, 말도 잘 못하는데 싫증 한번 내지 않고 매번 즐겁게 점심도 같이 먹고 놀아 주었다. 나중엔 펜카드에 밀이 잔뜩 남았다고, 고맙게도 몇 번이나 식사대접을 해주었다. 내가 밥을 사준다고 할 때마다 매번 거절하기만 해서, 아직도 미안한 맘이 한가득. 형상을 따는 건 다소 서툴렀지만,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강점인 게 나와는 정반대였다. 덕분에 실력 면에서도 좋은 라이벌이어서, 매번 서로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돌아서서 미진한 점을 고쳐나가곤 했다. 둘이 밤새워 스튜디오에서 파이널 과제를 할 때 얼굴에 목탄을 바르고 익살을 부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업도 과제도 할 땐 열심히 했지만 중간에 서너 번씩 지각했던 나와는 달리 한결같이 성실했던, 좋은 친구였다. 파이널 과제 역시 물론이고. 찍어오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타이밍을 놓쳤다.
그와는 반대로, 조이스라는 사내녀석은 평소에 수시로 수업을 빠질 뿐더러 최소 25시간을 투자하라고 한 파이널 과제도 그 당주까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 아이디어에 관한 설명은 우리 중에서 가장 잘 했지만 정작 실적이 부족했달까. 결국 당일날은 스케치 끄적인 것에 불과한 백지를 걸어야 했다. 아무도 그것에 관해 지적하거나 뭐라하지 않았고, 선생님은 차분하게 그림의 장단에 대해서만 설명을 했지만- 선생님이 마지막에 던진 한 마디처럼, "I'll say nothing, because you just feel it in your blood,", 그 본인이 가장 잘 알았으리라. 그 자리 자체가 이미 불성실함에 대한 대가라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키보다 더 큰 그림을 완성해서 앞에 두고 있으니 어쩐지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앞에 나가서 서툰 영어로 열심히설명을 했다. 뭐라뭐라 굉장히 빠르게 말을 많이 해서 전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왠지 칭찬해주는 것만은 금세 알겠더라.;; 칭찬이 아니라도 아마 좋았을 것 같다. 나름 노력을 다해 완성한 작품을 누군가가 둘러서서 보아 주는 것만으로도 무지하게 기뻤으니까.
나왔을 때는 해가 명랑하게도 새파란 중천에 높이 솟아 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그러니까, 점수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이걸로 충분하니까. 공구가방을 꼭 쥔 채 마악 바뀌는 신호등을 가로질러 뛰어가던 그 순간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