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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Anabelle's Alphabet- by Tim Pratt



본래 이것은 아는 사람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번역했던 것이지만, 사정상 줄 수가 없게 되어 대신 올립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 몇 안 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볼 때 전인격을 보지 않고 아름다운 부분만 바라보며 대한다면 문제가 좀 있겠죠 아마.

늘 그 아름다움을 잃지 말고 행복하길 기원하면서.



Annabelle’s alphabet

애너벨의 알파벳

 by Tim Pratt

 

 


 A는 애너벨(Annabelle) 의 A, 오늘 갓 열 살이 된. 그녀는 엄마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옷' 이라 부르는 드레스를 입고 엄마 아빠와 함께 생일 축하 피크닉을 나와, 여름날 따스한 공기의 향을 들이마신다. 애너벨은 바람결에 딩동이는 선율을 듣는데, 돗자리 위에서 말다툼을 하는 엄마 아빠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애너벨은 음악 소리를 따라, 노랗고 파란 들꽃으로 가득한 들판을 지나 숲으로 간다. 들려오는 선율은 마치 세 음절짜리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듯, “애-너-벨”, 딸랑거린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친다. 엄마 아빠는 자기들끼리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다.

 

 B는 나비(Butterfly) 의 B. 애너벨은 언덕 위 키큰 풀 사이로 날갯짓하는 노랑나비를 보고 있다. 그녀는 나비가 내려앉을 때까지 쫓아가, 몸을 기울여 만개한 꽃 위에서 쉬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본다. 애너벨은 나비가 그녀를 쳐다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나비에게 눈이 있는지 없는지 잘은 모른다.

 아빠는 나비를 잡아 핀으로 꾹 찔러 유리 아래 봉해 둔다. 그녀는 창고에서 수집품을 관찰하는 아빠를 본 적이 있다. 창고는 그의 나비 수집품을 모아두는 곳이다. 가끔 딸이 곁에 있는지 모를 때면 그는 나비 날개를 똑똑 잡아 뜯는데, 애너벨은 그럴 때마다 두려움에 떨곤 한다.

 애너벨은 몸을 흠칫 떨고 나비에게 손을 내젓는다. “,” 그녀가 속삭인다. “날아가.” 나비는 날아가 버린다.

 

 C는 새장(Cage) 의 C. 어떤 소녀의 생일파티에서 애너벨은 새장 속에서 노래하는 파랗고 노란 파라킷(: 앵무새의 일종)을 보았다. 그녀는 잠시 그들을 쳐다본 다음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애너벨은 새장 문을 잡아당겼지만, 꽃무늬 옷을 입은 커다랗고 부드러운 여자가 그녀를 막았다. “안돼, 아가야,” 그녀가 말했다. “놓아주면 안 된단다.”

 날아가면 안 되나요?” 말하는 애너벨의 눈가가 달아오르며 눈물이 고였다. “안돼,” 여자가 다시금 말하며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이 있는 곳으로 애너벨을 돌려보냈다. “깃이 잘렸어. 어찌 됐든 날 수가 없단다.”

다시 자랄까요?” 애너벨이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D는 물론, 꿈(Dream) 의 D. 애너벨은 녹색 벌판의 꿈을, 그리고 종종 노래하며 숲과 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날아가는 꿈을 꾼다. 다섯 살 되던 무렵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엄마, 나 날았어. 지난 밤에 날았어!”라고 말했다. 엄마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먹던 달걀이 목에 걸렸는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꿈에서라니까,” 아빠가 신문에서 눈을 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꿈 얘기를 하는 거야. 누구나 그런 꿈을 꾼다고.”

애너밸의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접시로 눈을 돌렸다.

애너벨은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한다. 그녀는 매우 좋은 기억력을 가졌지만, 충분히 거슬러 올라가면 기억은 어느덧 안개와 그림자와 소나무로 변하고 만다.

 

E는 지렁이(Earthworm)의 E. 애너벨의 아빠는 주말 낚시꾼이다. 집 뒤편에는 아빠가 지렁이를 파는 한 뙈기의 검은 흙밭이 있다. 한번,무릎에 흙을 묻혀가며 어린 애너벨은 땅을 파는 아빠를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애벌레다.” 그가 꿈틀대는 긴 지렁이를 끄집어내 양동이에 떨어뜨리는 걸 보며 그녀는 말했다.

애벌레가 아니라,” 아빠가 말했다. “지렁이란다.”

지렁이?” 애너벨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애벌레는 보풀보풀하고 나중에 자라서 나비가 되지. 지렁이는 미끌미끌하고, 자라도 뭐로도 변하지 않아. 하지만,” 그는 그의 손가락을 애너벨의 금빛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 앞에 들어 올렸다. “만일 네가 지렁이를 반으로 자르면, 쪼개진 반쪽 둘 다 살아남는단다.” 그는 주머니칼을 꺼내 지렁이를 부서진 벽돌 조각 위에 올려놓고 깔끔하게 두 쪽을 냈다. 피 한 방울 없이 쪼개진 두 마리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봤니?”

애너벨은 엄숙하게 한참 쳐다보고 나서는 말했다. “다시 붙여 주세요, 아빠.”

그는 두 조각으로 잘린 지렁이를 양동이에 던져 넣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건 곤란해, 애너벨. 도로 붙일 수는 없어.”

이런.”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붙일 수 없는지 궁금했다.

 

F는 요정(Fairy) 의 F. 애너벨의 어머니는 경건한 여자였다. 온 집안에 하얀 날개와 창백하고 예쁜 얼굴을 가진 천사의 상이며 그림을 잔뜩 걸어 놓았다. 훨씬 어릴 적 애너벨은 천사들을 요정이라 불렀다. “아냐,” 엄마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사들이란다.”

날개가 있는데,” 애너벨이 말했다.

엄마는 주근깨가 가득 뿌려진 팔로 그녀를 꼭 안았다. “나도 안단다, 아가야. 그렇지만 천사들이란다. 정말로. 그리고 너는 내 작은 천사지.”

하지만 날개가 없잖아.” 애너벨은 비꼬듯 말했다.

 

G는 정원(Garden) 의 G. 애너벨의 엄마는 여름만 되면 벌이 윙윙거리는, 장미와 꽃 무더기와 튤립과 다른 꽃나무들로 가득한 정원을 가지고 있다. 한번은 잡초를 뽑으러 보내진 애너벨이 꽃을 대신 뽑아 엮어 머리에 꽂고는 팔목에도 꽃팔찌를 만들어 걸었다. 그걸 본 엄마는 꺅꺅거리며 소리를 질러 댔지만, 애너벨은 치마를 한가득 펼친 채 차분하게 잔디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꽃이었다.

 

H는 머리카락(Hair) 의 H, 저녁놀처럼 바알간 애너벨의 머리칼. 아빠의 머리카락은 모랫빛 짧은 금발이고, 엄마는 윤기 없는 갈색의 보브 커트다. 애너벨의 머리카락은 굽이치는 곡선을 그리며 무릎까지 내려온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잘린 적 없는 머리칼이다.

엄마가 빗질하는 딸의 머리카락은 한 번도 엉키거나 걸려 빠지는 일이 없다. 엄마는 애너벨이 쓰는 샴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의 머리칼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더 생각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애너벨의 엄마는 대단치 않은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I는 순수(Innocence) 의 I, 하루하루 그 상태로부터 멀어져가는 애너벨의 오늘. 그녀의 아빠는 때때로 노는 애너벨을 바라보며 찡그리고, 또 어떨 때는 잭--랜턴처럼 비죽이 웃음 짓지만, 절대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은 없다. 벌을 줄 때조차. 가끔 그가 그녀를 안아줄 때 그는 긴장하는 것 같다. 아빠는 결코 그녀의 등을 쓰다듬거나 오래 건드리지 않는다. 애너벨의 천진난만함은 여전하지만, 오늘부터 그녀는 열 살이며- 두자릿수의 삶을 살아감에 따라 순수는 차츰 사라져갈 것이다. 다시 이어져야 할 무언가를 위해 남겨진 시간 역시, 차츰 줄어들어 간다.

 

J는 기쁨(Joy) 의 J, 그리고 그녀의 부모에겐 그게 바로 애너벨이다- 혹은 그랬거나. 그랬어야 했거나. “우리 아가는 신의 선물이야,” 새로 찾아낸 딸을 집으로 데려오며 엄마는 말했다. 망설이고 떨면서. 엄마는 손을 배에 얹었다. “우리는- 난 정말 아이가 갖고 싶었어.”

그녀는 젊은 남편이 부엌에서 물론. 나도 안다고. 단지 먼저 좀 처리할 게 있을 뿐이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서걱대는 소리. 다시 한 번, 금속이 돌에 긁히는 소리. 애너벨의 엄마는 눈을 감았다. “날카롭게,” 그녀가 말했다. “가능한 한 날카롭게. 너무 다치지 않도록. 난 물을 끓일게.”

익숙한 녹색 벌판에서 멀리 떨어진 집 구석 어딘가에서, 어린 애너벨은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K는 나이프(Knife) 의 K. 애너벨은 악몽으로 가장한 흐릿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열 살이 되어서도 아빠는 그녀의 음식을 직접 잘라 주어야 했다. 애너벨은 칼을 건드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기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는데, 살갗 밑에서 움직이는 그녀 자신의 근육을 너무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등에 수축할 수 있는 근육을 갖고 있었지만 어찌 됐건 전혀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빠가 음식을 잘라내 접시에 담아줄 때 벽을 쳐다본다. 애너벨은 칼날을 쳐다볼 수가 없다. 혹은 나이프를 휘두르는 아빠를.

L은 잃어버린 것(Lost things) 의 L. 애너벨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만 아빠는 그랬던 적이 거의 없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딱 한 번 그랬었다. 계단 꼭대기에서 애너벨은 아빠가 엄마에게 소리치는 걸 들었다. “그게 없어졌어! 옷에 잘 싸서 옷장에 넣고 잠갔는데  없어졌다고! 당신 그걸 가져다 뭐한 거야?” 엄마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난 그게 싫어. 당신이쌓아둔 것들조차도. 절대 안 건드려.”

그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엄마가 조용히 말했다. “아마도 날아갔겠지.”

 

M은 음악(Music) 의 M, 혹은 신비(Mystery) 의 M, 어쩌면 둘 모두의. 그 딩동대는 선율, “--이 숲에서 언덕을 넘어 울려 온다. 새 소리도 아니고 종소리도 아닌 그 소리를 몇 발짝 떨어진 돗자리 위의 엄마 아빠는 듣지 못한다. 오늘은 애너벨의 생일이고, 그래서 그녀는 바구니가 달린 분홍색 자전거와 날릴 수 있는 새 연을 선물로 받았다. 연은 풀숲 속에 잊힌 채 놓여 있고 자전거는 집에 들어 있다.

애너벨은 또 다른 선물을 받게 될지 궁금해한다.

 

N은 정상(Normal) 의 N, 어떤 건 정상이 아니다. 그런 건 잘려나갈 필요가 있다. 애너벨의 아빠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엄마 역시 안다. 설령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할지라도.

애너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상이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무엇이다. 그릇되지 않은, 단지 그 자체일 뿐이다.

 

O는 바깥(Outside) 의 O, 그리고 그것은 애너벨이 지닌 가장 이른 기억이다. 바깥에서 작은 숲 속에 누워 별들과 소나무를 올려다보던 기억. 잃어버림. 큰 가지가 부러지고 요람이 떨어질 때 노래 속의 아기처럼 풍경도 함께 굴러 떨어진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 키 큰 사람이 그녀를 숲 속 바닥에서 안아 올리고는 놀라 감탄하며 그녀를 뒤집는다. 애너벨은 그 기억들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는 그 둘 중 하나의 목소리를 닮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의 나지막한 음색은 또 다른 한 명의 목소리이다.

때때로 애너벨은 집 밖으로 몰래 나와 뒷마당에 누워, 소나무들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P는 피크닉(Picnic) 의 P, 그 얼마나 멋진 생각인지. “애너벨은 생일 피크닉을 좋아라 할 거야.” 엄마가 말했다. “참 좋은 날씨고 말이지. 그런데 어디로 갈까?”

나무숲이 펼쳐진 근사한 들판을 하나 알아.” 그녀의 아빠가 사려 깊게 대답했다.

그들은 차에 짐을 꾸려 애너벨과 새 연을 들판으로 데려갔다. 아빠 엄마 모두 그곳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이 좀 더 젊었을 적, 종종 이곳 숲으로 산책을 나왔었음에도. 이상야릇한 구름이 그들의 기억을 숨기고 머릿속을 채운다. 정확히 십 년 전 꼭 이런 여름 밤, 그들은 이 들판을 마지막으로 들렀었다. 나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건 아빠가 나비를 날개고 뭐고 없이 통째로 클로로포름에 담그게 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나비와 날개들을 유리장에 넣어 봉하기 이전이었다.

그들이 애너벨을 찾아내기 직전이었다.

 

Q는 숨죽임(Quiet) 의 Q, 그리고 애너벨이 그랬다. 술렁대는 바람조차 멈추었고, 아빠 엄마는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조그만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여전히 딩동대는 선율이 들려오지만, 그건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애너벨의 콩닥대는 심장 소리조차 가락을 놓치게끔 하기에 충분하다: “--…. -.” 그렇다, 선율이 흐려져 간다. 쫓아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가야만 한다.

 

R은 가름(Ripping) 의 R, 칼이 무디고 잘리는 것이 강하지 못해, 날을 당기는 손끝에서 피가 샘솟아 나올 때 R은 숫돌 위에 놓인 칼을 가는 줄. 그러나 어떤 것은 단정하게 갈라내기엔 지나치게 단단히 붙어 있어서, 칼날이 얼마나 예리하든간에 찢어지고 만다.

 

S는 상처(Scar) 의 S. 애너벨의 등에는 어깻죽지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빛나고 넓은 두 줄의 상처가 있다. 엄마는 애너벨이 비틀거리다 못이 박힌 널빤지 위로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가 아직 아기였을 때 개에게 할퀴어서 생긴 상처라고 말해 준 것은 아빠였다. 때로 애너벨의 근육은 상처 아래서 경련한다. 그리고 아침에 종종, 나는 꿈을 꾼 다음날이면 어깨가 아파져 온다.

 

T는 시간(Time) 의 T. 애너벨은 느낄 수 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태양이 서녘으로 미끄러져 감에 따라,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어 간다.

 

U는 탯줄(Umbilicus) 을 일컫는 U, 어린애의 배에 영원한 흔적을 남기는 어머니와 딸 사이 최초의 연결. 애너벨은 배꼽이 없었다. 그녀의 배는 어떤 흔적이나 자국조차 없이 복숭아의 껍질처럼 매끈하기만 했다. 애너벨의 엄마는 때때로 그녀와 애너벨이 절대 겪어보지 못한 영원한 단절- 가위로 잘려나가는 탯줄에 대해 생각한다. 가위 대신 칼이 있었고 잘려나간 건 탯줄이 아니었으며, 끊어진 것은 어머니와 딸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전혀 색다른 것이었다.

이제 애너벨은 생일날 들판에 있다. 어떤 관계는 영원히 끊어진 채지만, 어떤 관계는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다시 한 번.

 

V는 빈틈없는(Vigilant) V, 그리고 애너벨의 엄마가 그렇다. 엄마는 언제나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늘 엄마의 머릿속 첫번째를 차지하고 있어, 평소의 그녀는 애너벨을 거의 시야 밖에 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신경은 다른 곳을 맴돌고 심지어 딸을 잠시 잊어버리기까지 한다. 생각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리고 엄마는 소녀 시절로 돌아가, 새롭게 느껴지는 그녀의 남편과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 애너벨과 나이프가 있기 전의. 끈적한 비단 같은 추억은 이상스러우리만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지금 마악, 애너벨이 언덕을 넘어 숲을 향해 사라져 버리려는 듯.

 

W는 걱정(Worried) 의 W, 애너벨은 엄마 아빠가 걱정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딩동대는 선율은 점차 커져만 가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그녀 일부분이 그녀를 불러내어, 애너벨은 결국 들판을 가로질러 숲으로 달려가고 만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노래는 마치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닮았고 그녀 자신의 노래를 닮아 있어, 이윽고 그녀를 집으로 불러낸다. 달리면서 애너벨은 거의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X는 제노포비아(Xenophobia) 의 X, 낯선 이에 대한 증오. 애너벨은 그 단어를 모른다. 엄마도 모른다. 설령 아빠가 그 단어를 안다 해도, 결코 자기 탓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딸은 낯선 누군가이고 그의 아내 역시 여러 면에서 그러하며, 무엇보다 그 자신이 가장 그러함에도 아빠는 진심으로 그 모든 것을 혐오한다. 지하실에 앉아 나비의 날개를 찢으며 애너벨을 찾아냈던 그날 밤을 회상할 때 그는 혐오감에 젖는다. 절대 어떤 걸 본래의 그것 아닌 다른 무얼로 바꿀 순 없지. 피크닉에 나온 아빠는 두툼한 구름이 무심히 떠 가는 걸 바라보며 생각한다. 비상. 날아오름.

그리고 그의 아내가 애너벨 어디 있어?” 라고 묻는 순간,

모든 게 미친 듯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Y는 고함(Yell) 의 Y, 애너벨의 엄마가 소리높여 부르는. 엄마는 담요 위에 서서 딸의 이름을 외쳐 부른다. 그녀의 남편은 찡그린 채 서 있다. 손은 반으로 찢어버린 냅킨을 단단히 쥐고 있다. 둘 다 어디론가 가 버린, 정말로 사라져 버린 딸을 외쳐 부른다. 그들은 펄럭이는 파란 드레스의 자취를, 붉은 곱슬머리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숲 속엔 아무 것도 없다. 그곳엔 오직

 

Z는 서풍(Zephyr) 의 Z, 서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갑작스레 숲에서 일어난 바람이 들판을 뒤덮어, 애너벨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 부딪힌다. 백만 개의 날개에 맞서듯 불어오는 바람만이 그들에게 대답한다. 자유로이 떠다니는 사과꽃의 무더기처럼, 바람에 실린 비단 리본처럼, 수천수만 마리의 노을빛 황금 나비들이 숲에서 일제히 터져나온다. 날아오름.

 

그리고 마침내 애너벨은 그녀가 지렁이거나 천사거나, 혹은 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전혀 다른 무언가이다- 신록에 속한 아이, 마치 그 날개를 한번 잃어버린 후 시간이 흘러 다시 되찾은 나비와도 같은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