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이과 쪽 전공을 하시는 분 블로그에 들렀다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학도로서 이과적 지식에 바탕을 둔 글 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였지요. 과학의 속성 자체가 일종의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1)이다 보니, 그분 말씀마따나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글은 '소재 선정이 까다롭고, 글이 명령조라거나 정보 전달만을 목적으로 하는 딱딱한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C.P.스노가 20세기에 이미 했던 우려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미 그 속성 탓에 과학과 문학은 거의 상극이나 다름없지요. 과학 관련 소재를 다룬 글의 경우, 기사 혹은 에세이처럼 정보전달을 주 목적으로 하는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그나마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난 장르가 SF- 즉 사이언스 픽션인데, 사이언스 픽션의 경우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 혹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해 쓰여지는 경우가 드뭅니다. SF소설가 중 거장의 반열에 드는 르 귄의 경우, 과학적 방법론과는 큰 관계가 없는 '심리 신화'를 주된 테마로 내걸고 있죠. 이영도도 모 작품의 후기에서 판타지와 SF의 차이는 개연성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실 세계와 조금이나마 연관이 있는 쪽이 보다 SF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겁니다. 굳이 현대 과학의 이론이나 구체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지 않아도 SF로서의 조건이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과학과 문학의 접목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두 영역을 훌륭하게 버무려, 하나의 작품집으로 완성시킨 작가가 있습니다. 테드 창은 브라운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지만, 학자의 세계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작가의 길을 선택했지요.2) '네 인생의 이야기'는 그가 지난 10년간 발표한 여덟 개의 중단편을 묶은 모음집입니다.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기량은, 단순한 소재로서의 과학적 지식 활용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한 여성 언어학자가 과거의 시점에서 미래의 딸을 회상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연구하는 외계 종족 헵타포드의 언어는 그들의 미래-회상적 사고 체계를 반영합니다. 외계 종족의 언어를 토대로 그들의 사고방식을 추론하는 과정에서,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가 도출되지요. 그 사이사이에 그녀와 그녀의 딸이 겪는 에피소드가 2인칭 형태로 이어집니다. 어머니는 딸의 첫 순간을, 그녀의 열두 살을, 그리고 스무 살을, 암벽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스물 다섯 살을 과거의 시점에서 추억합니다.
페르마의 원리에 따르면 광선이 취하는 경로는 언제나 최소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입니다. 작가의 논리대로 표현한다면, 광선은 언제나 출발하기 전에 나아가야 할 모든 방향을 '알고'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치 원리에 따르는 빛처럼, 어머니는 애잔한 그리움과 기쁨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죽음을 회상합니다. 페르마의 원리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이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수학의 변분원리를 토대로 엮어진 새로운 이야기 속엔, 문학이 보여주고자 애쓰는 인간의 삶과 감정이 깃들어 있지요.
'영으로 나누면' 역시 수학적 원리가 외연과 내포를 동시에 아우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괴델의 무모순성 증명 앞에 좌절하는 젊은 여성 학자와 그의 연인의 이야기가, 작은 장마다 a와 b의 소분류로 이어지다 마지막 장면에서 a=b라는 기호 하에 한데 합쳐지지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조용한 파국을 그리는 관계와 수학적 세계를 통째로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는 증명이 한 이야기 속에서 평행을 그립니다. 다소 난해할 수도 있지만, 추상화된 세계의 아름다움과 우리가 맞닥뜨리는 인간적 현실을 그토록 매끄럽게 연결시켜 구현하는 필력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를 통해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갑니다. '일흔 두 글자' 는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한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골렘이라는 마법적 소재를 교묘하게 끼워넣어 진화와 생명윤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 '칼리그노시아'3)의 의무화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과 인터뷰 형식의 단편으로, 특히 현대 한국인에게 상당한 공감과 생각할 만한 거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일 인간의 외면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을 쓰시겠습니까?
그의 작품은 아이디어에 대한 철저하고도 엄정한 가능성 검토를 바탕으로 쓰여집니다. 그가 과작의 작가인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비단 SF로서만이 아니라, 과학적인 테마를 이토록 절묘하게 문학이 지향하는 바와 결합시킨 작품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SF에 특별히 관심없는 문학 독자 혹은 문학에 취미가 없는 과학적 인간이라 할지라도, 한번쯤 읽어 봄으로써 좀더 폭넓은 시각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요.
1) 통섭, 에드워드 윌슨, 112p
2) 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책날개에서 발췌
3) Callignosia. 실미증(失美症). 미나 선을 뜻하는 접두사 calli와 실인증을 의미하는 agnosia를 결합한 조어. 실인증이란 지각 기능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뇌의 통합 기능의 손상으로 인해 시각이나 청각 자극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증세를 가리킨다. 같은 책 338페이지의 각주에서 발췌
P.s 위에 언급한 원리들에 대해 너무 많은 걸 묻지 말아주세요-_-; 제가 문과인고로 소설에 설명된 딱 고만큼밖에 이해를 못했습니다 OTL
P.s.s 후배와의 대화
N: 왜요?
S: 아니 그냥..
S: 글을 쓰려고 하는데 초입이 잘 안잡혀서 골머리를 앓는 중
N: 그냥 가끔씩 글에 솔직해지는 것도 방법 아닌가요
N: ㅋㅋㅋㅋ
N: 가령
N: "...아... 리뷰 조낸 쓰기 싫고 제육볶음 때문에 배불러서 졸린데, 다른 책은 읽고 싶어서 씁니다."
S: ....예리한데
S: 안되겠어 죽어줘야겠다 <-
-_-; 뭐 그렇죠... 도서관에서 한번에 빌릴 수 있는 양이 다섯 권 뿐이라 이거라도 반납하지 않으면.
그나마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난 장르가 SF- 즉 사이언스 픽션인데, 사이언스 픽션의 경우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 혹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해 쓰여지는 경우가 드뭅니다. SF소설가 중 거장의 반열에 드는 르 귄의 경우, 과학적 방법론과는 큰 관계가 없는 '심리 신화'를 주된 테마로 내걸고 있죠. 이영도도 모 작품의 후기에서 판타지와 SF의 차이는 개연성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실 세계와 조금이나마 연관이 있는 쪽이 보다 SF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겁니다. 굳이 현대 과학의 이론이나 구체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지 않아도 SF로서의 조건이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과학과 문학의 접목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두 영역을 훌륭하게 버무려, 하나의 작품집으로 완성시킨 작가가 있습니다. 테드 창은 브라운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지만, 학자의 세계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작가의 길을 선택했지요.2) '네 인생의 이야기'는 그가 지난 10년간 발표한 여덟 개의 중단편을 묶은 모음집입니다.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기량은, 단순한 소재로서의 과학적 지식 활용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한 여성 언어학자가 과거의 시점에서 미래의 딸을 회상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연구하는 외계 종족 헵타포드의 언어는 그들의 미래-회상적 사고 체계를 반영합니다. 외계 종족의 언어를 토대로 그들의 사고방식을 추론하는 과정에서,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가 도출되지요. 그 사이사이에 그녀와 그녀의 딸이 겪는 에피소드가 2인칭 형태로 이어집니다. 어머니는 딸의 첫 순간을, 그녀의 열두 살을, 그리고 스무 살을, 암벽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스물 다섯 살을 과거의 시점에서 추억합니다.
페르마의 원리에 따르면 광선이 취하는 경로는 언제나 최소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입니다. 작가의 논리대로 표현한다면, 광선은 언제나 출발하기 전에 나아가야 할 모든 방향을 '알고'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치 원리에 따르는 빛처럼, 어머니는 애잔한 그리움과 기쁨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죽음을 회상합니다. 페르마의 원리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이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수학의 변분원리를 토대로 엮어진 새로운 이야기 속엔, 문학이 보여주고자 애쓰는 인간의 삶과 감정이 깃들어 있지요.
'영으로 나누면' 역시 수학적 원리가 외연과 내포를 동시에 아우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괴델의 무모순성 증명 앞에 좌절하는 젊은 여성 학자와 그의 연인의 이야기가, 작은 장마다 a와 b의 소분류로 이어지다 마지막 장면에서 a=b라는 기호 하에 한데 합쳐지지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조용한 파국을 그리는 관계와 수학적 세계를 통째로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는 증명이 한 이야기 속에서 평행을 그립니다. 다소 난해할 수도 있지만, 추상화된 세계의 아름다움과 우리가 맞닥뜨리는 인간적 현실을 그토록 매끄럽게 연결시켜 구현하는 필력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를 통해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갑니다. '일흔 두 글자' 는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한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골렘이라는 마법적 소재를 교묘하게 끼워넣어 진화와 생명윤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 '칼리그노시아'3)의 의무화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과 인터뷰 형식의 단편으로, 특히 현대 한국인에게 상당한 공감과 생각할 만한 거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일 인간의 외면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을 쓰시겠습니까?
그의 작품은 아이디어에 대한 철저하고도 엄정한 가능성 검토를 바탕으로 쓰여집니다. 그가 과작의 작가인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비단 SF로서만이 아니라, 과학적인 테마를 이토록 절묘하게 문학이 지향하는 바와 결합시킨 작품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SF에 특별히 관심없는 문학 독자 혹은 문학에 취미가 없는 과학적 인간이라 할지라도, 한번쯤 읽어 봄으로써 좀더 폭넓은 시각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요.
1) 통섭, 에드워드 윌슨, 112p
2) 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책날개에서 발췌
3) Callignosia. 실미증(失美症). 미나 선을 뜻하는 접두사 calli와 실인증을 의미하는 agnosia를 결합한 조어. 실인증이란 지각 기능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뇌의 통합 기능의 손상으로 인해 시각이나 청각 자극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증세를 가리킨다. 같은 책 338페이지의 각주에서 발췌
P.s 위에 언급한 원리들에 대해 너무 많은 걸 묻지 말아주세요-_-; 제가 문과인고로 소설에 설명된 딱 고만큼밖에 이해를 못했습니다 OTL
P.s.s 후배와의 대화
N: 왜요?
S: 아니 그냥..
S: 글을 쓰려고 하는데 초입이 잘 안잡혀서 골머리를 앓는 중
N: 그냥 가끔씩 글에 솔직해지는 것도 방법 아닌가요
N: ㅋㅋㅋㅋ
N: 가령
N: "...아... 리뷰 조낸 쓰기 싫고 제육볶음 때문에 배불러서 졸린데, 다른 책은 읽고 싶어서 씁니다."
S: ....예리한데
S: 안되겠어 죽어줘야겠다 <-
-_-; 뭐 그렇죠... 도서관에서 한번에 빌릴 수 있는 양이 다섯 권 뿐이라 이거라도 반납하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