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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ld I ask you a favor

아직 ELP 수업을 듣고 있을 작년 가을학기 때, 학적상 볼일 때문에 스테파니의 사무실로 찾아간 적이 있다. ELP에서 까다롭기로 제일 악명이 높은 선생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찾아갔을 때도 이미 한국인 유학생이 호되게 한 소리 듣고 있었다. 그 서류는 여기서 받아 주지 않는다, 미리 챙겨왔어야 할 것 아니냐, 등등의 매몰찬 말을 듣고 그 남학생은 뻘쭘하게 등을 돌려 나가야만 했다. 오오, 무섭다. 이제 내 차례로군. 올 것이 왔구나. 마음을 가다듬고는 아직 험상궂은 기색이 역력한 스테파니에게 말을 걸었다.

"Excuse me, could I ask you a favor?"

갑자기 스테파니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뭐, 뭐야. 어리벙벙해 있는 내게 스테파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So, what kind of favor do you want me to do?" 에에, 그렇죠. 용건을 말해야겠죠. 그날 내 볼일은 알고 보니 스테파니 담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성내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설명하고 나서는 미소로 나를 돌려보냈다. 피셔 베넷 홀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며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분명히 아까하고는 태도가 딴판이었어. 설마 Could I ask you a favor, 그 한 마디 때문에?

어쩌면 그 남학생은, 들어오자마자 데면데면한 태도로 용건부터 들이밀었던 게 아니었을까. 혹은 지레 움츠러들어서 인사하는 걸 잊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영어가 서툰 한국인이라면 무의식중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간단한 말 한 마디가 사람의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니. 어찌보면 별것 아닌 예의범절인데도 말이다. 내가 했던 게 큰 배려였다곤 생각지 않지만, 가끔은 별것 아닌 듯 여겨지는 예의범절, 그것도 예의바른 말 한 마디가 중요한 순간이 있을 수 있나 보다. 그 일은 이후 오랫동안 인상깊게 남았다.

얼마 전에도, 과학기술학 연계전공에 대해 물어보러 오후 느지막히 학사지원부를 찾아갔었다. 어디나 그렇듯이 학사지원부들은 불친절하기로 악명이 높고 문과대도 예외는 아니다. 아뿔사, 타이밍이 좀 별로였다. 누가 케잌을 가져왔는지 멤버들이 다같이 둘러서서 시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가장 쪼렙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포크를 놓고 다가올 듯 말 듯 애매한 거리에서 내 질문을 받았다. 저, 전공과목이 뭐가 있는지 리스트가 필요한데요. 아,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아가씨가 돌아가서 아주머니뻘인 학사지원부 왕언니에게 소곤댔다. 이분은 전에 들렀을 때도 몇 차례 보아 낯이 익었는데, 한번 쏘아대기 시작하면 진짜 무섭다. 왕언니는 싫은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닌 기색으로 서류철을 뒤지더니 파일 하나를 들고 넘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길래, 미안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케잌 드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왕언니가 고개를 들고 날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많이 먹으면 살쪄요. 잠만. 리스트가 필요하다니까, 내 이거 복사해 줄게." 오. 학사지원부에 자주 다닌 건 아니지만, 그분이 웃으시는 건 처음 봤다.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 복사해 준 리스트를 받아들고 나오면서 문득 작년 스테파니와의 일이 겹쳐서 떠올랐다. 하루 종일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사람에 지치고 종종 짜증을 낼 수도 있을 게다. 그만큼, 상대를 신경쓴다는 느낌이 드는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반갑게 반응하는 게 아니련지.

물론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라서, 이런저런 배려를 했는가 하면 동시에 맘에 안 드는 사람 신경도 잘 긁어 놓는다(소싯적 나 모르게 돌던 별명이 독설가였다고 한다.ㄱ- 그런 티 안나게 정진해야지...휴). 그렇지만 역시 관공서나 기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하면 상냥한 태도로 대하고 싶다. 당장 내가 학사지원부에서 일한다고 해도 고압적인 상대보다는, 의례적일 망정 예의바른 말 한 마디를 하는 사람에게 더 친절할 것 같다. 그런저런 작은 일들로, 그 사람들도 결국 무례한 태도에 발끈하고 상냥한 말에 누그러지는, 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