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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말한다는 것

이번에 우리가 공연하는 작품은 햄릿이다. 내 배역은 여동생 오필리어를 잃고 미쳐 날뛰는 그녀의 오빠, 레어티스다. 햄릿의 비극적 플롯을 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지만, 검색해 보면 거트루드나 오필리어보다도 자료가 없는 완전한 조연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들어서 대놓고 그를 고집했다. 뭘 몰랐던 처음엔 다들 배역 고르는 일을 사다리타기만큼이나 가볍게 생각했고, '하고 싶은 캐릭터는 하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라는 모토 하에 레어티스 역은 자연스럽게 내게 돌아왔다.

그러나 교수님이 기대하는 수준은 높았다. 무대와 문의 배치라든가, 포컬 포인트의 조성이라든가, 배우가 서 있는 구도와 자세의 고찰이라든가, 요구하시는 그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다. 리허설 전 주의 첫 번째 무대에서 실패를 맛보고 나서야 다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우리가 연기할 연극은, 학예회도 드라마 시디도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나 역시 남자가 되어야만 했다. 레어티스는 어쨌거나 남자였으니까.

확신이 점차 옅어졌다. 내 귀에는 잘 들리는데 다른 사람에겐 전달되지 않는 내 목소리처럼,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를 낮추고 성량을 늘리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분명 화가 나서 팔을 휘두르는 장면을 보여줬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눈엔 그저 가볍고 귀엽게만 비쳤다. 보폭을 억지로 늘려 봐도 여전히 걸음걸이는 공기를 밟는 것처럼 사뿐했다. 제기랄, 이라는 짧은 대사조차 소화할 수 없어서 온갖 다른 욕설로 바꿔 봤지만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아 대본에서 아예 빼버렸다. 켜켜이 쌓인 기억의 창고에서 분노와 슬픔은 얼마든지 끄집어낼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자의 몸을 한 S의 감정이었지 레어티스의 그것은 아니었다. 혼란에 빠진 내게 누구도 제대로 된 해답을 일러주지 않았다.

대체 뭐가 다르길래 이 모양일까. 왜 화를 내고 발악하는데도 여성스럽기만 한가. 암담한 기분으로 밤 늦게 버스에 주저앉아 창 밖으로 지나치는 남자들의 걸음걸이를 관찰했다. 삼십 명 가량 눈앞을 스쳐갔을 즈음, 문득 너무 당연해서 잊어버렸던 사실이 떠올랐다. 남자는 여자보다 체중이 무겁다. 최소 십 킬로에서 많으면 사오십 킬로까지도 더 나간다. 여분의 하중이 고스란히 걸음걸이에 실려, 더 큰 무게감으로 땅을 디딜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골반이 작은데다 앞쪽에 성기가 있는 관계로, 서 있을 때의 무게중심 역시 여자와는 또 다르다. 22년간이나 여자의 골반 위에 평균체중을 지탱하며 살아 왔으니 당연히 신체언어에서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게다.

그전까진 욕지거리를 하고, 털썩 주저앉고, 균형을 잃지 않고 절도있게 성큼성큼 걷는 것만으로 남성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믿음이었는지 새삼 절감했다. 손끝의 가느다란 움직임에서부터 척추와 골반을 거쳐 땅으로 떨어지는 선의 흐름- 한 걸음 디딜 때마다, 골격의 균형이 달라질 때마다 선은 번번이 새로운 흐름을 탄다. 그렇게 몇만 번씩 반복되는 정묘한 실루엣이 비로소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의 몸을 만들어낸다. 매일 지하철을 타러 뛰어가고 버스에 올라타면서도, 그 몸에 대해선 몇천 몇백 번을 거듭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뒤쪽 모서리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는 작은 방아쇠며 돌쩌귀들이 있다. 우리는 입 밖으로 꺼내놓는 말보다도 더 빈번하게 눈빛을 나누고, 기억에도 남지 않을 미세한 몸짓으로 사랑을 주고받고 미워하며 낙심한다. 정신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육체가 시작되고, 육체는 주인조차 모르는 사이 그녀 혹은 그가 살아가는 세상을, 말 없는 소통의 방식을 결정한다. 여전히 나는 여성의 발로 오십삼 킬로그램의 체중을 지탱하며 말랑말랑한 손가락을 움직여 11월의 낙엽을 주워든다. 하이힐이 아닌 운동화를 신고 발꿈치에 조금 더 힘을 실어 디디며. 짧은 시간에 온전한 남성으로 변모할 수는 없어도, 아주 작은 것부터 한 겹씩 덧씌워 가면서, 내가 그리는 햄릿의 레어티스는 조금 더 남자의 모습을 닮아 갈 것이다. 아마도.



P.s 내가... 되게 여성스러운가 보구나. -_-; 처음 알았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낭패인 건지 사실은 좀 혼란스러운걸.

P.s.s. 참고로 오늘의 리허설은 성공이었다. 대사도 안 까먹었고, 까먹은 건 눈치 못 채게 애드립으로 처리했고, 레어티스 독백 씬에서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몸짓언어는 딸렸지만... 그냥 포스로 압도했...던 거면 좋겠다. 비극이 비극답게 되었고 교수님께 칭찬도 들은지라 말하는 건데, 정말 하기 직전엔 정신줄이고 뭐고 다 놓아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정말이지 못하겠다고 싹싹 빌면서 저 멀리 어딘가로 미뤄버리고 싶었다. 긴장이 탁 풀리니까 죽을 것 같았는데 겨우 정신 차려서 쉬면서 이 글을 쓴다.

...돌이켜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게, 지난 주 금요일에 대본 다시 짜서 주말 연이틀 풀로 바치고, 월요일까지 합쳐 한 37시간쯤 연습해서 리허설 올린 거다. 블랭크 버스 번역본 그대로 하다 보니, 햄릿이나 레어티스는 물론이요 심지어 클로디어스 대사는 A4 반 페이지 스트레이트로 넘는 것도 있더라. 그런데 다들 그런 걸 다 외워서 올린 거다... 이틀만에. 눈빛에 동선에 몸짓까지 합쳐서. 무서운 사람들. 난 정말 무서운 팀과 함께하는 건지도 몰라. 6백년 전 로즈 극장에서 매일매일 다른 연극 올린 것도 이제는 믿을 수 있겠어. 그치만 진짜 이런 식으로는 두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_-; 정신력 체력 소모가 극심하다. 계속 바닥에 부딪쳤던 무릎은 피멍에 딱지가 앉았고 입안도 헐기 시작했다. 후. 머리 상처도 나을 리가 없지. 쉬자. 좀 쉬자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