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도서관과 서점을 비교하는 글을 썼던 적이 있다. 도서관은 고인 물, 속 깊은 호수, 술지게미 바닥에 잠긴 포도 씨앗이다. 중도 어문학실은 최근 몇 년간 가장 편안한 곳이 되었다. 은신처란 이름의 흔한 비유를 끼고, 눈에 걸리는 책을 찾아 느릿느릿 움직이다 보면 마음은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낸다. 접시에 담긴 젤리처럼 말갛고 단정하게.
한국문학과 외국문학 서가 사이에 의자와 컴퓨터, 카운터가 들어서 있다. 바다를 건너듯 로비를 지나면 하루키와 류, 카오리와 바나나, 소세키와 오사무가 있다. 일본을 거쳐 실크로드(1년쯤 전 린위탕의 '생활의 발견'을 집은 게 다다)를 건너면 몇 권 안 되는 아랍, 친분이 있는 이는 파묵이나 칼릴 지브란 정도. 중동을 넘어서면 유라시아 대륙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러시아 문학이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한다. 중량감과 품위, 유머감각이 느껴지는 그 세계에 섣불리 손대지 못하는 건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가 맘에 걸려서일까. 그 다음은 동유럽, 차페크와 스타니스와프 렘. 말 없이 정원을 손질하는 계절, 모퉁이의 계피색 가게들에 들여보내 주세요. 갓 잡은 피 냄새를 풍기는 중남미 소설들 위로 드리운, 밀가루 반죽을 떼어 입에 넣는 아우라의 망령. 세풀베다 주위에 고산지대의 희박한 공기가 떠돈다. 서유럽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문학이 버티고 있다. 단테, 바우돌리노, 칼비노, 에코. 보통 이 사이의 서가 세 줄을 좋아해 자주 맴돌곤 한다. 인기가 좋은지 서가 두세 줄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문학. 반쯤 의무삼아 읽은 카프카- 상드의 서간과 투르니에의 산문 빼고는 의외로 내키지 않는 동네다. 그리고, 영미문학이 시작된다. 영어 번역투 특유의 날카로움은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안경을 꼭 눌러쓴 근시안의 작가들이 열을 지어 서가마다 빽빽이 꽂혀 있다.
오늘은 비가 온다. 빨간 부겐빌리아꽃이 어울리는 날이다. 반쯤 젖은 꽃잎의 외롭고 선명한 색채. 이런 날엔 영국 문학이 안 맞는다. 미국문학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지만ㅡ 피츠제럴드의 통속적인 연민이나 버릇없는 마크 트웨인의 문체를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어서 돌아 나왔다. 맘에 두었던 라셀라스와 제5도살장은 다음 기회로 미뤄두고, 마음에 떠오른 심상을 따라간다. 피 냄새와 섹스 없는 순수한 야생의 꽃, 꽃은 시. 남미의 끝에서 네루다를 찾았다. 어쩐지 칼비노의 팬이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선조 3부작의 두번째를 집어들고ㅡ 그래도 역시 유일하게 만질 수 있는 타국 언어는 영어 뿐인걸ㅡ 나이폴을 읽어보기로 했다. 대륙에서 떨어진 트리니다드의 거리라면 조금 쉴 수 있겠지요. 미겔 스트리트, 미겔 데 우나무노, 안개, 페르디두르케.
마음에게만이라도 마음이 원하는 걸 먹여 주자. 책을 고르며 사람은 길 잃은 마음의 자취를 좇는다. 서가 갈래갈래 난 길을 따라가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누군가는 슬픈, 기쁜, 혹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수줍게 서 있는 당신의 그림자. 언제건 마음놓고 쉬어갈 수 있는 책도, 몇 권 만들어 두자. 조지 오웰의 산문은 참으로 다정해서, 지칠 때는 그저 펴들고 그 품에 안긴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해변은 살랑대고 일렁이는 물결로 가득해 아플 정도로 넘쳐흐른다. 지금은 바닥에 가라앉은 조약돌처럼, '이 땅에 주는 이름, 내 꿈의 가치, 겨울 눈으로ㅡ' 아모르 이 칸타, 씨엘 토 코코로, 아메, 치첵, 밀루유... 고마워요. 고마워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