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누군가 그랬다. 외로움은 가장 인간다운 속성이라고. 오롯한 개체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존재만이 외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남'과 분리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 '남'과 필연적으로 같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고독은 찾아든다. 사람들은 엄습하는 외로움에 맞서 '너'의 존재를 찾아헤맨다. 함께함으로써 외로움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생각과 기억과 행복한 시간을 나눌 수 있는, 남이 아닌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너를. 사람이기에 우리는 늘 타인 아닌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것들이 영원하지 못하다. 노환으로 찾아온 뇌졸중, 인도로 잘못 뛰어든 트럭, 불의의 사고로 탈선한 열차 때문에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다. '너'의 부재는 깊은 고통을 남긴다.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누군가에게 기대어 우리 자신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누군가가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상실감은 외로움만큼이나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이다. 네안데르탈인의 가슴 위에 놓여 있던 이름모를 부스러기는 말린 꽃이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을 추억한다. 어느 장소, 어느 시대든간에. '살인의 역사'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소 불완전한.
1.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추억의 시간은 길다. 사라진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 시간은 더욱 길고 고통스러워진다. 어린 올리비아가 실종된 후 34년간 아멜리아의 삶은 불완전했다. 부재의 무게는 늘 짐처럼 그녀의 삶을 짓눌렀다. 복숭아 요거트를 좋아하고 더티 댄싱을 열 번이나 본,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이 있는, 그해 가을에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던, 착하고 상냥했던 테오의 딸은 영원히 열여덟 살로 남게 되었다. 남겨진 이들은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
2.
사설 탐정 잭슨 브로디는, 포와로나 홈즈에 비하면 경이로운 수준으로, 그들의 처지에 공감할 줄 안다. 최소한 그는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려 한다. 그 역시 어린 시절 누나를 잃었고 이제 하나 남은 딸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기에. 아멜리아, 테오, 잭슨의 삶은 상실감을 정점으로 한데 맞물려 있다. 일인칭 시점의 챕터는 대화를 나누듯이 자연스럽게 세 명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려준다.
3.
그리고 여기, 뭔가 잃어버린 사람이 한 명 더 있다ㅡ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 나중으로 미뤄도 좋을 것 같다.
4.
세 편의 프롤로그는 신선하다. 하얗고 둥근 양파를 썰듯 가감없이 드러나는 삶의 일화는 맵고도 즙이 많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나'의 일상처럼. 다소 무심한 듯한 문체는, 사실, 지극한 관심의 표현이다. 첫 서른 페이지 동안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특별한 과장 없이도 모두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평범mediocre 혹은 평범 이하의 인물들- 늙고 추레하고 주눅든 빈민가 강사와 비만 때문에 모두가 피하는 중년 남성, 영양실조에 걸린 노란 머리 구걸 소녀는 친구나 삼촌, 누이를 바라보듯 익숙하고 평이한 시선을 통해 '사람답게' 그려진다. 상실감에 고통받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universal 인간의 모습으로. 신속하고 깊이있는 감정이입은 단연코 이 소설의 강점이다.
5.
모든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작가는 남겨진 인간들의 인간다운 모습을 차분하고도 능란하게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지 알고 싶어한다. 주의: 오직 그것만이 '미스터리'의 핵심이다ㅡ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 일순위는 결코 트릭이 아니다. 사람이다. 교묘한 트릭이나 놀라운 반전을 보고 싶다면 차라리 동네 도서관에 가서 아가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을 찾는 편이 낫다.
6.
한 가지 더. 펼쳐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으기까지의 숙성 과정이 부족하다. 신속한 감정이입이 신속한 해피엔딩을 만났을 때 과연 기뻐할까?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서는 날것의 신선함 이상을 노릴 필요가 있다. 모든 이가 남프로방스 출신은 아니니까.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자체는 매력적이다. 적나라한 동시에 애정어린 시선을 유지하기는 힘든데,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괜찮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늘어진 살과 베코타이드와 자기연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아멜리아와 줄리아의 슬픔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답고 진중하다. 잭슨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증거를 모은다. 대부분의 단서는 그들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 겹씩 피어난다. 모든 단서가 펼쳐졌을 때 남는 것은 진실이다. 활짝 핀 장미 한가운데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고 꽃을 비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장미꽃이니까. 이 소설에서, 사건의 진상이란 바로 그런 뜻이다.
미스터리가 아닌 드라마를 원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도 같다.
Epilogue.
원제는 Case History다. 개별적인 사건에 시간의 더께가 쌓여 이룬 나름의 역사. 그러나 결론: 어떤 것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저질러진 모든 살해의 배후에는 무수한 개인의 슬픔이 숨어 있다. 빗물처럼 스며드는 상실감, 혹은 끈질긴 사랑의 흔적이. 모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감정들이다. 우리는 슬퍼할 때 가장 순수하다. 꾸밈없는 인간의 모습은 약간의 엉성함조차 용서하게 만들어, 결국 생각보다 긴 리뷰가 되고 말았다. 중요한 골자는 거의 늘어놓았으니, 숨겨진 나머지 한 명의 이야기는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자던 로라, 버터를 바른 뜨거운 토스트를 좋아하고, 인디아나 존스 영화는 뭐든 다 좋아했지만 스타워즈는 좋아하지 않았던 로라, 처음으로 배운 말이 '개' 였던 로라, 비는 좋아했지만 바람은 좋아하지 않았던 로라, 아이를 셋 낳고 싶다던 로라는 파크사이드 사무실의 복사기 옆에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낯선 사람과 칼을 기다리면서. 온 세상이 새하얘지기를 기다리면서." - 50p
이런 사람에게 추천.
일인칭의 내면묘사를 좋아하는 사람.
지금까지 모은 영화표의 반수 이상이 드라마 장르인 사람.
사람들의 숨겨진 뒷얘기에 흥미를 갖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비추.
적나라한 일상 얘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
탐정과의 한판 두뇌 싸움을 벌이고 싶은 사람.
명쾌하고 뒤끝없는 결론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