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눈에 띄게 무덥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젤리처럼 물컹한, 점도 높은 무더위다. 삼키다 목에 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불안정한 날씨처럼 요즘 나의 운도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한다. 한 발 내디디면 다시 한 발 멈춰서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흐름이다. 몇 년째 마음 속 메타-극장은 소용돌이치는 잿빛이다. 스크린에 자막이 뜬다. 이것도 저것도 보류. 네 보류입니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니 좀더 두고 보자구요. 그전까진 통렬한 슬픔도 가열찬 환희도 금물. 요가에서 사바사나 송장 자세를 취할 때 손바닥을 위로 두면 좋은 기운이 들어온다고 한다. 즐거운 일이 있었든 슬픈 일이 있었든, 마음 속 친숙한 잿빛에 대항하는 내 손바닥은, 언제나 위를 향하고 있다.
그처럼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일이 일어나리란 희망, 내일이 밝으리란 희망은 놀랄 만큼 많은 것들을 아름답게 한다. 나타샤는 그래서 아름다웠다. 젊고 무지해서, 오로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밖에 몰라서 그토록 아름다웠다. 멋대로 접근해 온 난봉꾼 아나톨리를 사랑한다 굳게 믿은 채 안드레이 공작과의 약혼을 저버린 그녀는 이윽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된다. 낯선 남자의 접근은 열정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켰지만, 후자를 따르기에 나타샤는 너무 밝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창백해졌고 많이 앓았다. 마음 속 파수꾼은 그녀의 기쁨을 벽장에 걸어닫고 무수한 일요일을 오직 반복되는 단 하루로 만들어 버렸다. 독기 없는 허영심과 순전한 애정으로 가득찼던 시절은 이제 나타샤의 내부에서 종언을 고했다. 나는, 어쩐지 페이지 위에 팔을 걸친 채 꽤 자주 밖을 내다보았던 것 같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은 건 지나친 안타까움으로 인해 죽어버리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세상은 아득히 넓어서, 사랑만으로 채우기에 충분치 못하다. 오직 사랑만을 알던 좋은 시절은 언젠가 지나간다.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등을 타고 멀리멀리 초시간가를 향해, 시간이 간신히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곳으로.
요가 갈 시간이 다가와 책을 덮고 일어섰다. 나타샤의 이야기는 내 속에서 아직 미완이다. 내 이야기, 동시대인의 이야기 역시 언제까지나 미완이다. 삶은 잿빛 무더위처럼 점도 높은 불확실성으로 덮여 있고, 불확실성을 지각하는 한 인간은 한없이 연약하다. 하루키는 긴 글을 쓰는 과정을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행위에 비유했다. 죽음의 밑바닥에서 펜을 놀리며 그는 한없이 되뇐다: 경찰이 빙글빙글 돌리는 자동 권총이 날 향해 폭발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바지리코 화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적어도 이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만은.
오늘 가득찬 사랑이 내일은 텅 빌 수도 있다. 무지갯빛 계단의 끝은 아득한 허공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서 모든 불행이 찾아든다. 알 수 없어서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기대고 싶어한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자는 신앙이 있다는 말도, 그런 측면에서 일리가 있다. 적어도 분별이 있다면- 이 미친 세상에서 신(혹은 절대적인 위치로 격상시킨 무언가)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미친 짓이다.
그리고 여기 기독교인이 있다. 전에 없이 희망에 찬 모습으로. 방금 수련회를 다녀온 그에겐 교리가 있고 믿음이 있으며,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신이 그에게 많은 것들을 보장해 준다. 구원과 내세와 신앙을 담을 안정된 틀이. 그 낱말들은 따스하다. 불확실성과는 거리가 먼 그의 인식망은 언제나 따뜻함이라는 이름의 주파수로 고정돼 있다. FM **.*.
너도 회개하면 좋을 텐데.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세는 찾아오게 되어 있어. 거부한다고? 아직 미성숙해서 그런 거야. 너도 언젠가. 나, 심리학 전공인 후배 하나를 상담하려 해. 그 아이의 썩을 고독을 위해 뭐라도 하려 해. 아참, 그리고 그 아이가 가려는 심리학의 길을 방해하고 싶어. 심리학자들이 내게 저지른 짓을, 난 싫어하거든. 정히 가려면 내 방해를 뚫고 가라고, 그런 방해를 뚫고 선택한 거라면 아마도 진짜겠지? 난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너의, 그 모든 걸 이해한다는 태도가 정말 싫어. 그만 끊어! 너무나 오랜만에 비이성적으로 화를 냈다. 그를 정말 좋아했기에, 내 마음의 연약한 부분을 걸고 기댈 수 있었기에, 그가 한 모든 말들은 이성이라는 한계를 넘어 아주 손쉽게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 내 조리에 맞지 않는 분노가 그를 상처입혔듯이.
바로 문자가 왔다.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밤늦게 상담신청으로 깨어 있게 해서 미안하다고. 난 그가 사과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차라리 왜 화를 내서 사람을 놀라게 하냐고, 내게 맞서 똑같이 화를 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웰메이드 사과는, 그 순간만큼은 어쩐지 전형적인 기독교인의 따스함-공식 하에 도출된 해답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는지 이해도 못 했잖아, 사실은?
넌 나를 언제나 받아 주었지. 다른 사람에게 못할 말도 네겐 할 수 있었어. 하지만 네가 없었던 동안 내가 기댔던 건 힐가드와 앳킨슨 14판과 소셜 사이콜로지였어. 네가 없는 사이, 기독교의 구원과 보혈과 복음을 전하는 무수한 사람의 무리 대신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심리학의 가치중립적인 지식, 이론과 학설이 내 눈물을 닦아 주었어. 신의 마음은 잘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니, 어째서. 썩을 고독은 그 후배만이 지닌 게 아냐. 요컨대 썩을 고독이란 모두의 마음 속에 무리지어 자라고 있어. 죽음에 이르는 병은 언제나, 천천히, 인간의 마음 속에서 자라고 있어. 다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앙을 가질 수 있기에 사람은 살아가는 거야. 그것이 너의 밝고 따뜻한 기독교가 아니라도, 가끔은 괜찮을 수 있는 거야. 교리와 복음이 해결하지 못하는 비탄은 너무나 많아.
너를 구해 줬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걸로밖에 구할 수 없다는 마인드가 전부라면, 그저 나이브한 믿음이잖아?
내게 조언을 구해서 난 충고했지. 그냥 들어. 듣는 거야. 상대를 비추는 거울, 섀도우, 낮게낮게 흐르는 물이 되어 그 속으로 흘러가. 듣는 이는 자신을 드러내면 안 돼. 철저히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인격을 벗어나 그 사람을 위한 귀가 되는 거야. 뭔가 말하려 하지마. 절실할수록, 하나님의 복음이 너를 인도할 것이라고 확신을 심어주고 싶을수록, 말 없이 들어야 해.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도래한 이래 해결되지 못한 비탄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알려줄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야. 듣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서 사람을 타고 흘러 전해지는 게 복음이라면, 복음 역시 사람의 법칙 한가운데 존재해. 사람의 세상이 만들어내는,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간이기 때문에 저질러지는 무수한 패턴들은 이른바 노이즈. 신의 주파수는 단일하지 않아... 너는 너의 밝은 법칙 속에 있어서, 빛에 인식망이 멀어 버린 걸까? 니부어가 말한, 우둔한 빛의 자식들처럼?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를 죽여 전 인류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냐. 기독교인들이 어쩔 수 없이 사람이기 때문이야. 아무리 그 법칙이 올바르고 아름답다고 해도, 법칙을 따르는 이가 법칙 그 자체일 순 없어. 너는 어디까지나 사람이니까. 나 역시 사람이니까. 육신을 가진 세계에서 사람답게 말하고 걸으며 소통하고 웃고 미워하고 증오하며 사랑하니까.
먼저 이해해야 해. 너를. 네 주위 사람을. 그들에게 제일순위로 필요한 건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온기야.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적어도 심리학은 내게 그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빛, 보혈, 영원한 천국의 약속보다 기꺼이 잿빛 불확실성을 택하리라 마음먹은 것도, 내세 대신 잠 같은 죽음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인류(혹은 운명공동체)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 사이 어딘가를 헤매며 한없이 균형을 향해 수렴하려는 인식망을, 강요로 돌변할 수도 있는 영원한 따스함에 고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종교는(프로필에도 적었지만) 대우주의 의지와 문학이다. 그는 내 '대우주의 의지'를 언젠가 '하나님'으로 바꾸고 싶다고 농담삼아 말했었다. 미안하지만 내겐 농담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이 침침한 세상을 좀더 유머러스하게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농담이었으니까.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대우주의 '뺨을 때리며' 우린 서로 사이가 안 좋아, 라고 당당하게 웃을 수 있었으니까. 무언가를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곳이 바로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니까.
오늘도 여전히 날씨는 무더웠다. 염천교에서 서울역까지 걸어가는 길, 젤리 같은 무더위는 땀이 흐르는 내 온몸을 감싸고 살랑거리며 흘렀다. 그건 더운 여름 날씨로 드러나는 일종의 순리였다. 운이 잦아들면 조심해서 걷고, 운이 기세를 만나면 조금 더 명랑하게 뛰어도 좋다. 그러나 어쨌든 눈 앞의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인간으로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완전히 잊어버릴 순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늘 그렇듯 모 역에서 내려 짝짝 샌들소리를 내며 어스름 무렵의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버스를 타기 위해. 모든 게 그대로다. 오늘도 운이 좋았다. 그건 오늘의 요가, 사바사나 자세에서 손바닥을 위로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