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1.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으면 하루키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 위의 말은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에서 나가사와 선배가 와타나베에게 했던 말로서, 그는 이후 연인인 하쓰미와 자살한다. 그러나 여전히 몇몇 번역본의 책띠에서 위의 문구를 찾을 수 있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2. 개츠비의 번역본이 엄청나게 많이 출간되었지만, 제대로 되었다고 할 만한 건 거의 없다는 점도 실망스러운 일이다. 2장의 첫머리를 제대로 망쳐놓은 걸 보고 화가 나서 출판사를 확인하니 문예출판사... 이런.
3. 이 글은 영화를 보고 휘갈겨 적었던 해석을 정리하여 하나의 긴 글로 완성한 것이다. 영화는 잭 클레이튼 감독의 76년작으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 주연이다.
쓰면서 꽤나 즐거웠으며, 참고로 짤방은 없으니 긴 글을 싫어하는 분을 위해 미리 알려드립니다 (웃음) 그리고 매우 스포일러니까, 보지 않으신 분은 피해주세요.
'위대한 개츠비'는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다. 개츠비의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의 주제를 대변하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이 지닌 주제의 다의성을 단지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 혹은 '다양한 연애의 변주' 선에서 한계짓는 것은 그저 표면적인 현상에 머무른 해석이라 생각된다.
같은 맥락에서,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연정을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항문기 고착(성인기의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성격을 암시함)으로 단정짓는 것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틀의 사랑 방식과 데이지의 사랑 방식을 수동/능동의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하는 것 역시 수많은 겉핥기식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분법적 구도란 얼마나 편리한가! 발산/수렴, 수동/능동, 선/악, 삶/죽음- 닫힌 개념들의 대립쌍은 가히 쫓겨 쓰는 레포트를 위한 패스트푸드라 할 만하다.) 하물며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의 함의를 소설 속에서 잠시 등장한 마술 쇼라는, 소재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삽화에 비견한다는 것은 심한 어폐가 있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줄 수 있는 것, 소위 '표면적으로 제시된 연애 사건'을 넘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단 영화라는 컨텍스트를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닉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닉은 데이지의 육촌으로서 개츠비와 데이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지만, 만일 연애 이야기가 피츠제럴드가 보여주려던 것의 전부라면 굳이 닉이 일인칭 화자로서 기능할 필요는 없다. 개츠비를 일인칭 화자로 삼아 절절한 심정 묘사를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데이지가 그에 알맞게 화답함으로써 충분한 할리퀸의 자격을 갖출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닉은 관찰자인 동시에 독자-친화적인 렌즈다. 그는 많은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본 것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의 존재는 개츠비-데이지-톰-머틀-조던의 관계, 혹은 더 나아가 그들이 대변하는 사회의 일면과 독자와의 사이에 심리적인 거리를 생성한다. 이 거리를 통해서 독자는 1920년대의 미국 사회의 행태를 좀더 냉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닉의 존재가 소설적 장치였다면, 영화에서는 거리감을 다양한 이미지의 변주로 제시한다. 영상- 거울 혹은 물을 이용한 씬이 그것이다. 한 예로 개츠비는 수영장으로 향하는 테라스에서 데이지와 키스를 나눈다. 카메라는 천천히 내려가, 그들의 옆에 있는 작은 인공 연못에 비추여 흔들리는 둘의 물그림자를 비춘다. 서로 다른 두 인물간의 관계는 거울이라는 소재를 통해 깊이depth를 지닐 뿐더러, 관계에 존재하는 소외 혹은 불안을 암시하는 도구로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영화에서 개츠비는 푸른 정원을 내다보며 말한다- "Fresh green... like the dream of new world." 그것은 온전히 개츠비가 생성한 세계였다. 약간의 행운과 수많은 노력을 바탕삼아 현실 세계에 건설한 꿈인 것이다. 미국은 본질적으로 꿈의 나라다. 유럽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종교와 생활의 자유를 꿈꾸며 유럽인들이 건설한 세상이다. 누구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그 땅의 소출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1800년대 미국의 프론티어였다. 개츠비는 서부 태생이다. 프론티어의 아들인 그는 꿈을 쫓는 자이며 동시에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다. 개츠비를 단순히 톰과 데이지를 능가하는 물질주의의 노예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개츠비의 목적은 결코 부 그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물질- 대저택과 정원, 수많은 파티는 단지 데이지를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건너편 섬의 부두에서 반짝이는 녹색 불빛, 완성되지 못한 꿈, 유예된 자기 실현의 상징이다. 그가 데이지에게 선물하는 녹색 반지는 그의 꿈이자 열망의 집약체이다. 칼 로저스의 입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아를 확장하려는 능동적인 유기체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합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랑과 성취를 통한 자아실현을 증명해 보이려 한 것이다. 그에게 단순한 부는 의미가 없었다.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그에게 무한한 추진력을 주었다. 그래서 닉은 말했던 것이다. "It was the extraordinary gift of hope"라고.
그러한 개츠비가 속한 세계는, 슬프게도 더이상 프론티어 월드가 아니었다. 머틀은 말한다- "You can't live forever." 넘치는 현재의 풍요와 미래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불안은 심한 심리적인 불균형을 생성한다. 영화에서 비추어지는 미국 상류 사회의 풍경은 흡사 고야가 그린 'Royal Family'에 드러난 천박성을 연상케 한다. 신경질적인 웃음과 권태, 가장된 광기, 우발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 1920년대의 뉴욕이다. 영화 속에서는 빈번하게 파티 장면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수시로 춤을, 특히 여자들의 다리와 흩날리는 하반신을 클로즈업한다. 불안한 꿈의 끝은 제어할 길 없는 욕망, 더 나아가 소유하는 데 대한 극도의 탐욕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마침내 톰은 자신의 소유라 여겼던 데이지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을 깨닫고 개츠비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한다. 더위로 찌는 플라자 호텔 안, 침몰한 부의 세계에서 개츠비, 톰, 닉은 각자 한 마디씩을 내뱉는다: "Love me, too?" 거의 잡을 듯한 꿈을 눈앞에 두고, 개츠비는 당황한다. "She never leaves me." 톰은 이미 알고 있다. 데이지는 온전히 금으로 이루어진 존재, 물질적 꿈의 상징이다. 그녀는 결코 자신이 안주한 견고한 부- 출세한 뜨내기가 아닌, 근본과 기반이 확실한 부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그 누구보다 속물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톰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I'm 30." 민트 줄렙이 천천히 녹아 가는 더위 속에서 닉은 중얼거린다. 그는 이제 더이상 젊지 않고, 20대가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의 절반을 써버렸다. 희망과 이상을 찾아 동부에 도착한 그는 이상주의자와 속물이 지배하는 세계의 대립을 목전에 두고 깊은 회의를 느낀다.
진실을 깨달은 것은 톰만이 아니었다. 머틀은 그녀를 붙들고 토로하는 윌슨에게 절규한다- "You didn't have your own suit!" 그녀를 유혹한 것은 찬란한 부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녀의 꿈이 오로지 물질 그 자체에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머틀의 이상은 개츠비의 것과는 철저하게 다른 양상을 띤다. 그녀의 모든 것을 건 인간적 소망을 한낱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장식한 개줄로서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I didn't harm to nobody. You can't think you fool me." 윌슨은 선량한 인간으로서 누구도 해치지 않았으나, 그에겐 생명과도 같은 요소가 빠져 있었다- 부 말이다.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소유한 자는 그 자체로 전능하다. 윌슨은 머틀을 창가로 데려가 닥터 에클버그의 거대한 눈을 쳐다보게 한다. 윌슨에게는 그것이 '신의 눈'이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도덕률의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물질주의의 교리에 충실한 머틀에게는 낡아빠진 광고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에클버그의 눈과 피 묻은 캐딜락의 헤드라이트가 오버랩되는 장면은 이미지와 의미가 함수처럼 교차하는 명장면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살인과 죄, 도덕의 의미를 시각적인 수단을 통해 상기시킨다. '신의 눈' 인 에클버그의 시선은 데이지가 저지른 살인의 흔적을 명징하게 비춘다. 그러나 현실에서 에클버그의 눈동자가 단순히 퇴락한 광고에 불과하듯, 머틀의 살해 역시 올바른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채 개츠비의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그의 죽음은 수영장에서 이루어졌다. 카메라는 개츠비가 총을 맞아 물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꽤 시간을 들여 비춘다. 그의 모든 것이었던 아메리칸 드림 역시 그 주인과 함께 침몰하는 것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유일한 등불이자 유일한 희망인 데이지의 죄를 기꺼이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 톰은 그가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을 틈타 자신의 '소유'를 위협하는 둘- 개츠비와 윌슨을 동시에 처단한다. 개츠비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부캐넌 내외 앞에서 닉은 환멸을 느끼지만, 정작 톰은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남은 것은 극도의 자기합리화와 값싼 슬픔,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일 뿐이다. 대단히 피상적인 센티멘트의 소유자로 묘사된 데이지 역시 톰 이상의 인간적 깊이를 보여주는 데 실패한다. 이 둘은 상류사회의 속물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꿈'의 타락한 면모를 대변한다.
닐은 독백한다. 개츠비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친 것을 좇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 지나쳐간 순간의 꿈은 결코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개츠비는 알지 못했다. 그의 꿈은 타락해 버린adulterated 아메리카의 꿈이기도 하다. 전쟁과 한치 앞을 예견하기 어려운 실존적 불안 속에서 물질에 집착하는 세태를 거슬러 올라 모든 것을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피츠제럴드가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속하는 이유는, 비단 개츠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다수 단편들에서 풍기는 세기말적 체념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닉은 이스트를 떠나, 다시 한번 웨스트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최소한 단 한 명, 닉만은 개츠비가 지닌 꿈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를 다른 속물과 구별할 줄 알았으며, 최후까지 신의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의 존재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의 결심은 작가가 제시하는 사소한 형태의 희망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은 좌절된 꿈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자아실현에 실패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사실 개츠비라는 텍스트가 해석될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하다못해 텍스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만 해도 그렇다. 영화가 보여주는 파티의 미장센이나 데이지의 권태를 인간 실존의 문제로 끌고 갈 수도 있고, 원작에는 없었으나 영화에 추가로 삽입된 딸과 데이지의 몇 씬을 토대로 페미니즘적 진술을 추가할 수도 있다. 아니면 미국의 1900년대 사회배경을 소재로 삼아, 꿈의 타락에 관해 보다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서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P.s. 잠재적인 모호성은 한 텍스트를 컨텍스트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삶의 다양한 측면을 모색케 하는 문학의 본질이다. 구성적 측면의 장점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작품은 좋은 문학작품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다의성- 잠재적인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충분히 풍부한juicy 텍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