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연애를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도 아주 드물게 그런 얘기를 적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살인의 역사를 읽다, 문득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가방에서 만년필을, 프린트와 책으로 잡다한 책상 귀퉁이에서 잉크를 집어왔다. 걸어나오다 침대 모서리에 잔뜩 쌓아놓은 책을 무너뜨렸다. 가끔 잠에서 깨면 양 뺨에 딱딱하고 각진 촉감이 느껴진다. 가끔은 배꼽이나 손목 언저리에서 뒹굴기도 한다. 책은 생각보다 불안정한 존재다. 남자처럼.
부엌의 황금빛 불을 목덜미에 받으며 실버 세일러 F-4의 뒷마개를 열었다. 플라스틱 나사를 돌려 천천히 공기를 빼냈다. 손끝에 미미한 압력이 느껴졌다. 눈동자처럼 고요한 잉크 속에 촉의 끄트머리를 담그고, 천천히 나사를 감아올리면 소리없이 새까만 잉크가 빨려올라온다. 진공의 마법. 만년필은 만월에 다가선 달처럼 다시 차올라 무거워졌다. 휴지로 촉에 묻은 잉크를 닦아냈다.
세상엔 만년필만큼의 매력조차 갖추지 못한 남자들이 허다하다.
문득 한 친구가 물어왔다- 미도리 같은 여자가 세상에 있을까. 왜 없겠어. 내가 대답했다.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여자들은 내부에 송전탑을 지니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하고 모호한 전파를 끊임없이 쏘아보내며, 어디에서부턴가 날아올 회신을 기다린다. 와타나베는 우연히 그 잡음을 들었다. 듣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응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어와 한국어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듯.
어떻게 자신할 수 있냐면, 나 역시 어떤 사람들에겐 미도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미도리가 아니므로. 매력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이에게만 비로소 의미가 있으므로.
넌? 난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이 없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 대화하고 만질 수 있는 사람들.
뭐야, 잘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자기도 희망이 없으면서 나한테만 가지라니-
응. 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갖는 편이 낫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만년필은 누군가의 선물이었다. 종종 선물을 받곤 한다. 선물을 받듯, 가끔은 고백을 받곤 한다. 일년에 서너 번씩. 그러나 그들에게선 어떤 희망도 발견되지 않는다. 난 사람들 사이에서 조약돌처럼 매력을 주워 품에 소중히 간직한다. 갓 주웠을 때의 그것은 심장처럼 따스하다. 그러나 결국, 사랑과 희망과 매력은 제각기 다른 뜻의 단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냉정하게도. 매력은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해변의 모래처럼, 어디론가 덧없이 사라져버린다. 처음부터 보잘것없었으니까. 아마도.
누군가 내게 물었었다. 무엇을 찾고 있나요.
그런 당신은 무얼 찾고 있나요.
나아갈 길. 당신은?
아름다움과 사랑할 사람.
아름다움과 사랑할 사람. 그건 기묘한 자리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툭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난 언제나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내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볼을 어루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니까. 세계는 희망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지만. 난 여전히 매력적인 척 웃고 능숙하게 대화하고- 심지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만으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도 있지만, 돌아서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조금은 부러웠어. 너의 그 희망이 말이야. 내게 필요한 건 너의 미도리 같은, 상대일지도 몰라. 고백이나 선물이 아니라. 그러니까 너는 희망을 가져. 이루어진다면 좋겠어.
2008. 02. 01
P.s. 매력적인 남자려면 역시 쿨게이는 되지 않는 게 좋을까. (중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