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인스포팅을 보았다. 도서관을 올라갔다가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발견했다. 베를린 천사의 시 스크립트를 찾아 헤매던 시절 그의 희곡도 함께 찾았었는데, 당시 건진 건 독일어로 된 시 뿐이었다. 제목은 <소망 없는 불행>이었다. 빌려서 읽으며 압구정으로 향했다. 비바람에 스커트가 젖게 놔둔 채 골목을 돌아, 계단을 올라, 오렌지빛 따뜻한 공간에서 크라이슬러의 크로이처 소나타와 몇 개의 음반을 더 샀다. 돌아와 칼비노의 평론을 읽고 인용하여 호손과 콘라드에 대해 짧은 글을 썼다.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칙센트미하이의 유민 기념 강연을 들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두 번째로 관람했다. 예전부터 구상하던 단편 소설의 바탕을 짰다. 계절화의 콘티를 그려보았다.
말의 능선이 점차 완만해져 현실과 맞닿는 접점으로 가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때부터 나는 행동하는 인간에 가까워져, 이제 괴롭거나 답답하거나 아무것도 모르겠을 땐 그저 훌쩍 뛰쳐나가 비바람을 맞으며 낯선 곳에 간다. 동행은 필요없다, 오직 자신 뿐. 일은 언제든 좋다. 새벽에도 일하고 주말에도 일한다. 동틀 무렵 메일을 보내고 잠이 든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가끔 질문한다. 내게는 이행할 의무가 있다. 달성해야 할 목적이 있다. 그런데도 느슨해져 있다, 이렇게. 목적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작은 조각들을 망각하고 그저 감정에 몸을 맡겨도 좋은 것인가, 이런 식으로 놀러 다녀도 좋은 것인가,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은가,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직무 태만이 아닌지?
마음 속 목소리가 항변한다: 언제나 뭐든지 앞질러 하고 있잖아, 누구보다 빨리 하고 있잖아,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이 논문과 이 논문을 보내 줄게요. 이미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 Cortex vol. 42에서 미리 찾아 abstract를 읽어보았습니다. normalization은 해 봤나요? 네, 잘 몰라서 trial별로도 해보았고 개인 평균으로도 해봤으며 그룹 비교도 해보았고 에러율도 계산해 두었습니다. 보시고 어떤 방식이 옳은지 알맞은 지침을 주세요. 보고서를 좀 수정해야겠어요. 여기 필요한 부분만 골라 프린트해 왔습니다, 선생님.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시면 오늘 중에 수정해서 하드카피로 제출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엇이 부족한 걸까? ...언제나 부족하다.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나는 지나치게 부족하다. 잠시라도 노는 건 그만두고 정진해야 해. 집중해야 해. 다른 건 잊어버려. 여기저기서 찾은 논문이 쌓여 가고 빌려온 책들은 침대맡에서 굴러다닌다. 그저 생각만 하는 실험들이 있다. 멈추지 않는 결핍. 망설이는 자신.
피부 밑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일분 일초를 어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 가고 싶어. 시간을 파트너로 둔 채 저항하며 춤추고 싶어. 실 끝을 바짝 당겨 주름의 골짜기를 건너뛰어, 더 많은 것을,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