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쓰다가 바빠서 잊어버린 것, 갈무리해서 마무리지어 본다.-_-; 유행 다 지나간 다음에야 정리해서 올리는구나.
혼자서 봐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운동 후 젖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구르게 놔두고 머피스에서 산 닭가슴살 버거를 오른손에 움켜쥔 채 단성사로 향했다.
박쥐는 애초에 텍스트로 만들어졌다.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 정원이다. 누가 보든 그 안에서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면 된다. 정원에 한 갈래의 길을 더하는 유쾌한 심정으로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인간 아닌 존재가 되어 인간을 초월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일까? 그런 맥락에서라면 뱀파이어는 구원받은 존재이자 구원하는 존재다. 뱀파이어는 누구를 무엇에서 구원하는가? 인간을 언젠가 닥쳐올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 유한한 삶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비극적인 숙명이다.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치욕적이고도 명백한 진실을 거슬러 죽은 자를 삶으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구원일 것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상현이 돌보던 환자는 식물인간이 되고, 무력감에 고뇌하던 그는 자진하여 신종 바이러스의 실험대상이 된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엠마누엘 연구소의 원장은 상현에게 경고한다: 자살과 순교는 때로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저희는 신부님이 첫번째 목적에서 오신 분이 아니기를 빕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카메라 속 상현의 시선은 관객을 향한다. 시선은 질문이다. 구원하기 위해 죽음에 다가가야 한다면 구원에 대한 갈망은 타나토스일까 혹은 단순한 이타심의 정점일까?
놀랍게도 바로 다음 씬에서 갈망에 대한 응답이 일어난다. '순교'하는 순간 그는 '부활'한다. 우연히 받은 수혈로 뱀파이어의 권능을 지니게 된 그는 놀라운 구원자로 추앙받는다.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기적이 참이든 거짓이든, 본질적인 의미에서 상현은 더이상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무력하지 않다. 자신의 피를 나누어 줌으로써 불완전한 육체와 생명의 사슬을 끊고 두 번째 삶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형태로 이루어진 갈망은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제 상현은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산 인간의 피를 빨아야 한다. 뱀파이어에게 삶이란 곧 숙주의 죽음을 뜻한다. 상황은 정반대로 내몰렸다. 상현이 살아가려면 누군가를 희생해야만 한다.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타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도 이 지점에서 고스란히 뒤집혀, 타자의 생명을 담보로 '구원자'인 자신을 연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치환된다.
그러니, 처음부터 내러티브의 핵심은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라는 겉껍질 속에 숨은 욕망이다. 이타심이든 타나토스든간에 처음부터 욕망은 상현이라는 캐릭터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그것을 오브제 아, 라고 이름붙이고 관련된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지만 현재의 자신이 그 개념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가능성으로 남겨둔다). 상현이 본래 누구이며 왜 엠마누엘 연구소로 가고자 하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의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이 펼쳐갈 서사다. 영화평을 돌다 보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종종 발견하는데 감독은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했을 따름이다. 물론 불친절하다고는 할 수 있겠다.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안 될 무렵의 상현은 순조롭게 구원자로서 기능한다. 추종자들이 흔드는 붕대 감은 예수가 그것을 암시한다(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씬은 마치 이후 일어날 변화를 예고하는 듯하다). 그러나 차츰 신체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는 처음에 바랐던 대로 '순결한' 구원자로 남을 수만은 없게 된다. 누군가의 생명에 흠집을 내지 않는 이상 바이러스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오로지 이타주의적 논리에 따른다면 자살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지 않는다. 상현이 괴로워하면서 내뱉는 말,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지극히 인간다운 변명이야말로 이후 벌어지는 모든 일의 시발점이다.
이 시점에서 상현이 지녔던 갈망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그는 단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궁극적 욕망들 중 하나에 충실했던 것이다. 윤리의 원칙을 받드는 숭고하고 높은 존재, '구원자'로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타나토스에 가까운 형태로 전개된 것이야말로 상현의 '순교'다. 치환 후에도 자신의 욕망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일관되게 충실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부님의 돌변'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한 명의 인간다운 인간이 우연히 신부복을 입었던 것 뿐이다.
상현이 라여사와 강우, 태주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치환된 욕망의 세계가 펼쳐진다. 새로운 욕망의 형태는 이제 타나토스보다는 리비도에 가깝다. 그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하며' 피를 마시고 여자를 유혹한다. 그런데, 어딘가 그의 행동엔 미심쩍은 부분이 엿보인다. 병원에서의 섹스 직전 그는 태주의 발을 어루만지며 망설인다. 이러다 우리 지옥 가요. 성직자가 이러는 건 죄에요. 피 빠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 태주에게 상현은 열심히 변명한다. 그 사람 아주 착한 사람이에요. 내가 달라고 했으면 기꺼이 나눠 줬을 거라구요. 저렇게 많은데. 욕망에 충실한 그가 필사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율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슈퍼에고의 그것이다.
인간사의 오욕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가던 태주 앞에 나타난 '신부님'의 존재는 말 그대로 구원이다. 상현은 태주를 끌어안고 속삭인다: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 줄게요. 스스로에게 내재한 죄-구원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헀음에도 불구하고 상현은 여전히 자신에게 투영한 구원자의 이미지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뱀파이어의 구원은 죄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신나게 날아다니다가 땅에 착륙한 그는 태주를 안은 채 길고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우습고 비논리적인 장면이다. 뱀파이어의 능력이라면 한번에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지루할 정도의 시퀀스는 상현이 미처 떨쳐버리지 못한 모순을 영상으로 제시한다. 그는 깃털보다 가뿐하게 추락과 상승을 거듭할 수 있지만 여전히 골고다 언덕을 오르듯이 계단을 오른다. 그는 인간임을 포기하지 못한 뱀파이어, 인간이 지니는 슈퍼에고의 윤리를 포기하지 못한 욕망의 전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뱀파이어란 소재는 매우 적절한데, 뱀파이어가 지닌 욕망의 실현이야말로 인간의 룰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살인)이기 때문이다. 죄-구원과 욕망(이드 혹은 리비도)-슈퍼에고 간의 이중모순(더 정확히 말하면, 한 배를 공유한 두 가지 모순)은 그의 행보를 따라 우아한 대칭을 이루며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때 태주는 최악의 표현형이다. 현실의 여성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박 감독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자격 미달이며 태주 역시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현실 속 생동하는 여성을 태주에게서 읽고자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영화 속의 그녀는 철저하게 팜므 파탈로서 상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주는 상현이 지닌 욕망의 대상이자 목적이다. 상현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푸른 옷을 입는데, 파란색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색이자 성모마리아의 색이며 또한 정욕의 색이다(베티 블루 37.5도를 상기해 보자). 성녀와 악녀의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대상화된 이미지라는 점이며, 태주의 파란 옷은 그러한 이미지를 잘 대변하는 소품이다.
욕망의 대상이자 목적을 자기 손으로 목졸라 죽이는 순간 앞서 언급한 모순이 이를 드러내며 상현의 존재를 위협한다. 구원할 대상 없이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없이 욕망한다는 게 가능한가? 영화 속에서 그가 부여받은 역할은 욕망하는 인간이며 그 역할을 그만두는 순간 그의 존재는 무의미해진다. 대상화할 태주가 죽어버린 상태에서의 상현은 그 누구도 아니다. 자아의 파국을 막기 위해 그는 부활의 권능을 사용해 그녀를 살려낸다. 헌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이제 상현과 동등한 위치에 선다. 그녀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한정짓던 경계를 깨고 뛰쳐나와 욕망의 주체가 된다(물론 '욕망의 주체'가 현실 속 여성의 자아를 의미 있게 대변한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욕망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결코 상현이 바랐던 바가 아니다. 말했듯 구원자/욕망하는 자이기 위해선 구원받는/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태주에게 그와 같은 모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나빠?" 라고 그녀는 깔깔댄다. 그녀에겐 애초부터 구원자로서의 자각이 없었으며, 따라서 슈퍼에고가 강요하는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해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그녀의 욕망에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주는 원하는 만큼 사람을 죽여 피를 빨고 욕망을 충족시키며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한 존재다.
인간임을 포기하지 못한 뱀파이어로서 그는 끝내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사람을 죽여 발목을 자르고 매달아 놓을 때조차 '이렇게 하면 좀더 많은 피를 뽑아낼 수 있을 거야(그러니 살생을 줄일 수 있어)' 라고 중얼거리고 있으니 말 다했다. 상현은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푸는 대신 그것을 잘라버리기로 한다. 라여사의 눈은 인간성을 강요하는 눈, 윤리적 원칙에서 어긋난 욕망을 질타하는 눈이다. 그는 그 눈을 증인으로 삼아 자신에게 남은 최후의 인간성을 증거하고자 몸부림친다.
'박쥐'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할 때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 에 대한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대답이다. 무제한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면, 과연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완전한 뱀파이어가 될까? 이 영화가 비극인 동시에 희극일 수 있는 이유는 상현이 끝까지 쥐고 놓지 않는 일말의 인간성 때문이다. 귀여운 여자에게 동전을 구부려 보여 주며 쑥스러워하는 '착한' 신부님의 모습과,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또다시 죽이며 끝도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나쁜' 뱀파이어의 모습이 한 캐릭터 안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만이 가능한 대답의 전부는 아니다. 텍스트는 언제나 열려 있고 가지 않은 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끝도 없이 이어진다.
P.s.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웠던 것은 금기 앞에서 끊임없이 망설이는 상현의 모습이었다. 금기를 범하는 순간도 물론 자극적이지만, 그보다 금기에 한없이 근접하지만 그것을 범하지 못하는 순간 긴장은 최고조에 달한다. 어쩌면 그 긴장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섹시함'의 극치일지도 모르겠다. 하하.
P.s.s. 뒤에 막 써서 논리가 제대로 성립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드럽게 길어. 아무도 안 읽을거야 아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