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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象

1. 6. 오후, 필라델피아

하루 종일 비가 내린 다음날은 맑았다. 거리엔 촉촉함을 머금은 바람이 부드러웠다. 이래서야 봄 날씨네, 생각하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외투 대신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나와, 휘몰아치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반 펠트 앞 경사진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검은 흙이 언뜻언뜻 보이는 녹색 잔디에서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비스듬히 몸을 덮은 햇살은 기분 좋게 따사로웠다. 구름이 몇 점, 어디론가 경쾌하게 미끄러져 간다. 뜯어먹다 놓친 솜사탕 같다.

새파란 하늘에 비친 수많은 가지들은 선명한 회백색이었다. 가는 꼭대기가 바람에 차락였다. 생명력이 넘치는 여름의 나무는 누구의 눈에도 아름답지만, 잎 없는 가지도 그것대로 시원한 매력이 있다. 겨울의 딸들. 거칠 것 없이 홀가분한 기백. 어릴 적 어느 정월에 아빠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 연을 날리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날의 방패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쑥쑥 올라가, 우표보다도 더 작아져 흔들거렸다. 날선 바람이 상쾌하게 볼을 스쳤다. 마른 가지 끄트머리에 저도 모르게 까치며 까치밥을 그려보는 건 아마도 한국인의 심사일 터이다. 문화유산답사기를 몇 장 넘겨보다 배에 얹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토록 한가해서 아름다운 시간. 감은 눈가에 늦은 오후의 빛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