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은 보편적이다. 누가 습득하든 지식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습득한 A와 상대가 습득한 A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언제 어디서나 A를 탐색해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고, A를 알고 있는 타인이 그렇게나 많이 존재한다면 내가 A를 습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미를 찾지 못하면 지식을 굳이 내 것으로 습득할 이유가 없다. 습득을 차별화한다,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한다- 체화한다. 지식을 어떻게 체화할 것인가?
- 체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감흥이 선행해야 한다. 감흥 혹은 경이, 새로운 것을 처음 접했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 그 마음의 움직임이야말로 개별적 인간 고유의 것이다. 한 가슴이 느낀 체험은 결코 다른 이의 체험으로 대체될 수 없다. 느낀 바, affection 위에 지식, knowledge가 구축되어야 한다. 둘째, 창조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습득한 지식의 앞-뒤-밑-속을 다른 지식들과 관계짓는 과정은 창조적인 행위의 전제이다. A는 B와 연결될 수 있고 B는 C와 연결될 수 있다. 진부한 연결이 있고 새로운 연결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창조적인 관계맺음을 형성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창조적인 관계망 위에서 새로운 개념, 논리, 사상이 배태될 수 있다. 셋째로 표현이다. 어떤 창조적인 행위도 표현을 배제하고서는 의미 있는 결과물로서 온존할 수 없다.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된 지식, 혹은 지식의 관계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가 있다. 특정한 지식에 대한 감흥-창조-표현이 일체화할 때 비로소 그 지식을 체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내면에 미덕을 갖춘 인간은, 일상생활을 수행할 때에도 자신의 미덕을 드러낸다. 주위의 평범한 동료가 대화를 나누거나 의견을 피력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물건 값을 치르거나, 당혹하고 분노하고 기뻐할 때, 그 모든 면모에서 고결한 미덕의 가닥을 발견할 때 자연스런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야말로 '순결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비순결은 우리를 낙담케 하며'1), '선은 봄동산에 자라는 풀과 같아 보이진 않아도 매일 커짐이 있다'2)는 말과 같다. 존경할 만한 미덕을 품은 동시대인과의 접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1) 월든
2) 채근담
- 제안했던 의견이 다수에 의해 거절을 당한 후, 꽤 시간이 흘러 당시 내 의견의 적확성/타당성을 뒷받침할 근거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마다 혼란에 빠진다. 나의 사고와 직관은 정확했는가? 혹은 그들이 정확했는가? 전자라면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내가 제안했던 방식이 적합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 후자라면 내 부족한 판단력을 어떤 방식으로 증진시킬 것인가? 차후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입을 다물고 궁극적인 조화를 위해 다수의 의견에 따를 것인가? 여전히 많은 질문이 남는다.
- 발표 수업 때마다 느끼는 사항이지만, 거의 대다수의 학생들이(나를 포함해) 지식의 효과적인 전달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예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어도 방법을 모르거나, 방법을 알아도 체득하는 과정이 부실해서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거나, 대게 셋 중 하나이다.
- 몸은 정신과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외양과 이미지에 관한 것보다도(사실 아주 많은 이들이 외적인 이미지의 형성에 상당 부분의 집중력을 할애하고 있다), 정신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자신의 신체 기관에 대한 완전한 파악력을 지니는 그것이 중요하다. 나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추상성-이데아에 지나치리만치 경도되어 있는 인간은 몸과 정신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욱 많은 훈련을 해야만 한다. 춤, 연기, 운동 등등.
계속 쌓이기만 한다. 이런 식으로라도 아무렇게나 써서 토해내지 않으면 또 잊어버리고, 새로운 착상이 자꾸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