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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언어학대회, 첫날

<전반적인 내용: 이 행사의 뒷얘기. 뭔가 스펙터클한 내용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일곱 시에 일어났다. 배치는 우당교양관이었다. 간밤에 일정을 체크하니 세 시 이십 분부터 세션 시작. 인촌기념관의 등록접수는 여덟 시부터였다. 전원 일곱 시에 오라고 했지만, 순순히 따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실행한 지각. 미필적 고의...라기엔 거창하고 실은 그냥 늦잠.-_-;

8시 반께 도착해 명찰과 티셔츠를 받아들었다. 기념 펜이 수북히 쌓여 있길래 녹색과 보라색, 두 개를 골라 가방에 넣었다. 현장은 그야말로 우왕좌왕. 지저분한 건 뒷방에 아무렇게나 숨겨놓았더라. 그러면 그렇지.



<인촌기념관 102호를 대충 치워 만든 뒷방. 이런 거 몰래 찍는 거 좋아한다.
수면 위 우아한 폼으로 떠 있는 백조의 발은 정신없이 움직인다든가.
사실 카메라 들이대기 민망해서 허겁지겁 찍느라, 사진 전부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가방은 본부 105호실에 던져두고, 주머니에 카메라와 핸드폰을, 만일을 대비한 복사카드와 한 장짜리 연락처 및 지침 페이퍼, USB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방을 나섰다. 왼손에는 핸드북, 오른손엔 펜. 오케이, 롸져. 아임 레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우당교양관 안쪽에 붙어 있던 포스터. 네에 하지마리마스요.>


그 순간 갑자기 폰이 울렸다. 나이스 타이밍. 받아보니 같이 펜 다녀온 아는 언니. 저기, 신청만 해놓고 연락을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 너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오늘 가도 되는 거야? 2차로 받은 ppt 명단에 있어? 문자는? 전화는? 맨 처음의 엑셀파일 명부 빼고는 하나도 못 받았어. 아는 교수님 전화받고 겨우 일어난 거라... 그런 거면 그냥 와. 와서 부딪치면 어떻게든 해줄걸. 도착하면 교양관 105호로 와서 나한테 연락해. 그동안 대학원생 총책임자 찾아서 이어줄테니까.

조직에 참여해본 사람들은 알 수 있겠지만, (학교 내에서) 비영리로 운영되는 조직은 생각 이상으로 허술하다. 일단, 직접 학회 차원에서 컨택을 하고 일정을 짜고 기획하는 분들은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니 언급을 패스하고, 현장에서 뛰는 스태프 조직에 대한 얘기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윗선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보통 똑똑하니까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려든다. 2할의 책임자가 뛰어다니는 사이, 할 일을 마땅히 모르는 8할의 아랫사람들은 물어보려다가도 포기하고 그냥 논다. 혹은 어디 들어갈지 몰라서 구석에서 꾸물거린다. 상명하달이 명확하지 않아서, 헤맨다. 그러니까 당연히 어딘가는 과잉이고 어딘가는 부족이다.

그 부족분을 메꾸기 위해 건물 어딘가에서 멍하니 놀고 있을 사람들을 끌어다 효율적으로 쓰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왜냐하면 혼자서 다과 주문하고, 복사기 들여오고, 각종 가위랑 칼 등 챙겨오고, 인원 배치 확인하고, 출석 부르려면 뇌가 25개로 분할돼도 모자랄 지경일 테니. 뭐, 이런 상황에서 나 같은 독고다이 타입은 즐겁다. 내 할일 찾아 알아서 해두고, 누군가 도와달라면 도와 주고, 기타 시간에 적당히 숨어 재미있는 걸 챙기면 된다. 너무 이기적인가 (웃음)

길 가던 대학원생 언니를 붙들어 물어보았다. 신경질적인 답변이, 쓱 보니 자기 담당인 일 처리하기에도 바쁜가 싶었다. 표정이 이미 다른 데 할애할 여유가 없다고 외치고 있다. 포기하고 그 주위를 적당히 지켜보니 대빵인 것처럼 오가는 언니가 한 분 있었다. 무전기와 이어폰을 낀 차림이 예사롭지 않아, 가서 물어보니 예측이 맞았다. 쉬지 않고 명령을 내리며 전화를 받으면서도 지친 기색 없이 냉정하게 내게 답했는데, 그 모습이 일단 다행스러웠다. 일단 데리고 오란다. 역시.  


<이때가 약 오전 아홉 시 무렵. 아직 준비가 덜 됐다.
열심히 한글자모로 만든 전시물을 걸고 있는 남자분께 화이팅.>



<이와 대조적으로, 접수하느라 바쁜 인촌기념관 스태프들.>


할 일이 없으니, 놀고 있기보다 미리 준비를 해두기로 했다. 아홉 시 이십 분쯤, 내가 담당한 교양관 311호의 세팅이 끝났다. 기자재는 이미 최종 오리엔테이션에서 전부 체크한 탓에,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갔다. 복도를 서성이고 있으려니 가방을 든 중년의 남자분이 들어가시길래, 쫓아 들어갔더니 역시나 당일 세션에서 발표하는 분이셨다. 학교 컴퓨터는 USB를 넣을 때마다 번번이 마법사를 실행하는데, 중간에 꺼버리면 아예 아무것도 인식 못한다. 사소한 문제지만 모르면 낭패다. 간단히 도와드리고 파일을 옮긴 다음, 음성기호 폰트도 같이 설치했다. 그분은 일찍 와서 다행이라고 땀을 훔치며 나가셨다. 음, 얼리 버드가 계시구나. 종종 돌아다니면서 체크해야겠는데.

그 다음으로 워싱턴 대학에서 온 조그만 금발의 할머니가 들어왔다. 2초간 당황했지만(...) 미국인을 상대하는 접대용 미소와 함께 잘 세팅해 드렸다. 파일네임을 수정해서 폴더에 넣고, 화면에 폴더 창을 열어둔 후 아예 스크린도 같이 내려 두었다. 혹시나 내가 교실에 없는 사이에라도 알아서 세팅하고 갈 수 있도록.



<이곳이 그곳. 조촐한 크기다. 덕분에 빌려온 마이크는 필요 없었다.>



<3층 Refreshment Place. 그래봤자 강의실 책상 다 밀고 몇 개만 남긴 거다.
이때가 11시 무렵이었다. 배도 고프고 아무도 없길래 몇 개 집어먹고 싶었지만 소심한 마음에 참았다.>


언니가 105호로 들이닥쳐, 책임자가 돌아오실 때까지 얘기를 좀 나누었다. 최근 진로를 언어교육학 쪽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본래 스페인어 이중이라 남미 지역학 쪽을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고 물어보니 그쪽은 에,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뭐 우리가 다 그렇지. 자꾸자꾸 바뀌고, 혼란스럽고, 한참 길 찾을 무렵. 다 그렇지. 지난 학기에 4.5 띄웠는데 장학금 안 주더라. 응. 나도 4.4 띄웠는데 안 주던데? 9학기라서.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에휴. 공부해서 돈 벌기 참 힘들지. 그치.


책임자에게 티셔츠를 건네받고, 언니는 3층 다과로 배치가 되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김밥이 오지 않아, 근처의 작은 까페로 나갔다. 일자리 알선의 도움으로 빠니니를 얻어먹고 돌아왔더니 한솥에서 도시락이...(...) 이런. 내일부터는 꼭 챙겨 먹도록 하겠어!

문득 생각이 나 교실로 돌아가려니, 왠 남자애 둘이 들어간다. 가 보니 시원하게 머리가 벗어진 교수님 한 분이 혀를 끌끌 차고 계시고, 다른 둘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머, 누구시길래 제 나와바리에서 뭐하시나요(웃음). 어리버리하게 서 있는 녀석들에게 사뿐사뿐 다가가 USB를 빼앗(..)아 착착 세팅을 마쳤다. 들어 보니 한 시간 반을 헤맸다고. ...역시 이 컴퓨터는 미묘하다. 사소하지만 모르면 어쩐지 작동이 안 된다. 결국 컴퓨터 담당하는 스태프들까지 불러온 건가 보다. 교수님은 호쾌한 목소리로 아니, 고대쯤 되는 녀석들이, 이렇게 헤매면 쓰나. 언어학의 올림픽이라구, 올림픽 기타 등등의 말씀을 이었고, 두 명은 머리를 긁으며 돌아갔다.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포인터가 있으면 좋겠는데. 네 지금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가져왔습니다. 여기 이 버튼 눌러서 쓰시면 됩니다. 창의 블라인드는 내리면 되겠습니까? 스태프가 하는 건 별거 아니다. 잡일이다. 그래도 내가 담당하고 책임질 곳, 이라는 생각이 들면 작은 일이라도 열성이 생긴다. 교수님은 꽤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셨다. 아까도 컴퓨터에 뜬 백신 경고 메시지를 보고, 이거이거 안 되겠는데, 바이러스가 있으면 어떡할 거야. 내 거라도 옮겨줘야겠어, 라며 자리에 앉으시던 분이니, 곰살갑게 챙기는 걸 좋아하시려나. 흠.



<생각해 보니 7시부터 이곳에서 워크샵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에 이미 퇴근. 좀 고민하다 바탕화면을 아예 매뉴얼로 바꿔두었다.
스크린에 크게 띄워놓고 가면, 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문법이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읽진 마세요. 부크러워요. 이미 1번부터 관사 하나 빼먹고 -_-;>


세션을 체크했다. ...그동안 뭐라도 강의 들으며 맥락을 못 알아먹은 적은 별로 없었지만, 우와, 이번만큼은 무리. 좀 많이 무리. 무리의 거듭제곱. 토픽 없는 제너럴 세션이었는데, 첫번째 강의는 <Initial tensification in Korean loanword adaptation>. ....으음.... 한국어 빌린말(용어가 있을 텐데, 모르겠다)의 첫음 강세의 적용? ... 제목도 겨우 이해했는데 아스트랄한 내용이 펼쳐질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뭐 어쨌든 좋아. 마음을 굳게 먹고 들어주겠어.

예상 외로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한국어는 그들에겐 다소 희귀한 소수언어일 테니까. 듣기로는 이번 학회의 테마가 <소수언어의 다양성>이라니, 한국어로 강의되는 세션도 있다고 들었다. 전반적인 내용은 모른다.-_-; 피피티 프린트를 지금이라도 주의깊게 읽으면 뭔가 몇 줄 더 적을 수 있겠지만 사양합니다. 아아, 수업시간에 애들이 이래서 자는 건가. 강의를 듣는데 머리가 아파오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님, 스크립트를 줄줄 읽고 있어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무맥락 상태인데. 엄청 긴장하셨는지 이마엔 땀도 흘렀다. 역시 영어는 한국인의 주적이다. 이건 언어학 교수님이라도 피해갈 수 없군.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질문 시간에 손을 드는 건 주로 외국인들이었다. 교수님은 아베 히로시를 닮은 멋진 일본인 학자에게 <파이프에 걸리는 첫음절 강세(빠이프)가 일본어식 발음에서 유래한 건 아닌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신통치 않았다. 일본어로 파이프는 파이프입니다. 끝. 네 아쉽네요.



<아까의 호쾌한 교수님. 외대에서 오셨다고 한다.
수줍수줍한 태도로 선생님 강의하시는 모습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라고 했더니 매우 즐거워하시면서 허락하셨다. 크크.>


이 분의 주제는- <Theories of speech parts in the major early French and English grammers: Attempts of a proper theory for vernacular languages> 였다. 초기 불어와 영어 문법에 관한 스피치 파트의 이론이라. 음. 이거면 비교적 맥락을 잡고 들을 수 있겠는데? 좋아. 그러나 그 생각은 철저한 오산임이 곧 밝혀졌다: 교수님, 왜 불어로 강의하시나요! 간지나게!(...) 곧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가고 사회자를 비롯해 의지의 한국인 서너 분 정도만 남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도 남았다. 마음 속으로 울며 외쳤다. 물푸레나무님 도와줘요. 아 지금 프랑스에 계시지. 20분의 강의 동안 알아들은 건 Angles 한 단어 뿐.

그리고 강의 후. 그들도 불어로 질문하는가! 두근두근하며 기다리자 곧 연배가 비슷한 분이 입을 열었다. <I think only Koreans are in here. Can I ask the question in Korean?> ...교수님 나이스. 그래서 덕분에, 최소한의 Summary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온전한 내용은 아니지만 간략하게만 설명하면, 16-17세기 수도사들이 만든 port-royal 문법책이 일종의 원조격으로, historic grammar 부분에 중요한 일조를 한다고 한다. 심지어 촘스키조차도 자기 연구의 원조라고 직접 말했을 정도. 프랑스에서 15-16세기 경 발전한 문법이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영문법의 2/3 이상은 불문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됩니다.") 영문법에 영향을 끼친 결과, 17세기 중반에서부터 영국에서 통사론이 시작되어 18세기 중반에 한 분야로 자리잡는다. 그 이전까지 문법이라 함은 곧 품사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문법엔 오늘날 쓰는 용어들이 거의 수록되어 있었으며, 18세기 이후 영국의 통사론은 프랑스에도 역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문법의 역사가 언어의 역사와 늘 같이 가는 것은 아니며, 언어의 변화가 선행한 후 문법이 변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교수님 열강. 수고하셨습니다.>


그 다음 발표자는 두 명으로, 내용은 <Prosodic innovations in Northwest Indo-European: Circumstantial evidence for prehistoric contacts> 라고 한다. 북미 인도-유럽 어족의 운율학적 발전... 정도 되려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고, 놀랍게도 밤톨 같은 형상을 한 교복 중딩이 스윽 들어오더니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이다. 오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내가 물어보자 그는 심히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언어학에 좀 관심이 있어서요." 대단하다. 천재소년인가. 자네가 인도-유럽 어족의 연구를 일으킬 재목이 될 자질이 있는지 지켜보겠네. 물론 거짓말이지만.

그러나 미안하게도..... 발표자가 펑크를 냈다. 무려 두 명이. 오 마이 갓.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거나, 내게 사정을 물어보거나, 인상을 쓰거나 했다.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시고, 가서 상황을 물어보고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이미 안 오는 사람을 어찌할거나. 층장에게 상황을 알리고, 사회자에게도 말씀드려 다음 발표는 기다렸다가 정시에 시작하기로 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모처럼의 천재소년)을 포함해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괜히 내가 다 미안하더라.


다음 강의도, Prosodic에 관한 것이었다, <What determines the prosodic structures?> 였는데, 사례로 든 케이스는 경남 지방의 방언이었다- 피피티의 미디어를 틀자 구성진 사투리가 강의실에 울려퍼졌다. <요다 니 밥 안 묵나.> 푸훗. 분위기는 훈훈했고 반응도 좋았는데, 문제는 내가 운율학에 대해 일말의 조예도 없었다는 거다. 젠장. 이래서야 즐길 수가 없잖아. 



<이것도 몰래 나가서 반대편 문으로 들어와 찍었다.
찰칵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 것 같아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열강이 아름답습니다 (웃음)>



마지막 강의가 끝나자 머리가 멍했다. 워크샵이 곧 이어질 테니, 따로 뒷정리는 하지 않았다. 저녁 파트는 대학원생이 담당하는 것이다. 인촌기념관까지 올라가 겨우겨우 출석을 마치고 나서 바로 귀가했다. 내가 언어학을 전공했더라면, 혹은 평소에 관심이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심리학대회가 있다면, 적어도 누가 누구인지- 그 누가 하는 강의가 어떤 의미을 지니며 또 어떤 내용인지 좀더 쉽게 알아먹을 텐데 말이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왔던 거재니거라든가, 라팔이나 에스포지토, 디마지오라든가.

하지만 사회언어학의 일부 갈래 외엔 큰 흥미가 없고, 조예도 없으며, 시간도 없으니 열심히 일하고 다 일하면 적당히 재밌는 걸 찾아 돌아다니는 스태프의 한 명이 되는 수밖에요. 아하하.


이렇게 첫째날의 근무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