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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선언


그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인디안 서머 같은 시월 어느 오후, 난간에 얹어둔 산타페 헤이즐넛 캔을 바라보며.


"있잖아. 남자아이의 사랑은 단순해. 단순한 건 나쁘고, 복잡한 건 좋다는 흔한 이분법이 아냐. 좋은 단순함과, 나쁜 단순함이 있어. 좋은 단순함은 여자아이를 예뻐하고, 사랑하고, 귀여워하고, 지켜 주고 싶어하는 것. 나쁜 단순함은 윽박지르고, 짓누르고, 폭력을 휘두르고, 업신여기는 것. 하지만 어느 것이든 단순하긴 마찬가지야.

예전의 나는 그걸 몰랐어. 비난하고 경멸하다가 마음대로 안 되면 포기하고 떠나 버렸어. 좀더 시간이 지나서야, 단순한 것만이 갖는 미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런 단순함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있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서 원하듯이,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필요로 하는 그 부분.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남자에겐 인정이 필요하고 여자에겐 사랑이 필요하단 그 말. 완전히 부정하지 않아. 세상의 많은 남녀들이 그렇게 주고받으며 살아가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일까? 정말로 서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게 관계의 전부라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 시시할 거야. 남자아이의 사랑을 받는 건 행복한 일이야. 그러나 그것만이 여자아이가 이해하는 행복의 전부는 아냐. 적어도 여자아이인 나는, 그렇게 말하겠어. 남자아이를(혹은 남자아이가) 필요로 하는 '여자아이'의 부분, 그걸 빼낸 후 남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자아이가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메커니즘일 거야. 수천 수만 명, 제각기 다른 여자아이들의 '캐릭터'는, 아이덴티티는 남자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에 숨어 있어.


남자아이들은 그걸 몰라. 어쩌면 그게 단지 그들의 최선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스운 건, 있잖아, 너도 그 책 알지. '남자에겐 동굴이 필요해' 라는 가공할 현대의 격언을 만들어낸 연애지침서. 그 책은 마치 여자아이에겐 그럴 일이 없으며 그럴 일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태도로 말을 꺼내고 있어. 여자아이에게 필요한 건 남자의 사랑 뿐, 혼자만의 영역도 시간도 이해하지 못하는 생물이라는 시선. 내가 싫어하는 건 그거야. 마치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이랑 비슷하잖아- 봐, 너희들에겐 없는 거야, 부럽지? 라는 그런 태도. 그런 게 우스운 거야.

나는 잘 모르지만, 만에 하나 그 단순성이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 거라면,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야. 여자아이가 결코 모르는 남자아이의 세계- 그들에게 오로지 홀로 대면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면, 당연히 여자아이에게도 그런 세계와 순간이 존재하지 않겠어? 우린 인간이라는 동일한 종에 묶여 있으니까.



있잖아, 여자아이의 역사는 피의 역사야. 모든 여자아이의 핏속엔 전사의 기질이 흐르고 있어. 오늘날의 알파걸이 도래하기까지 수천 년간 얼마나 많은 어머니 세대가 스러져 가야 했는지 몰라. 영리하고 현명한 딸들은 자라서 어머니가 되고, 그 어머니는 다시 딸들에게 그걸 물려주고, 끈기 있게, 끈기 있게. 시체가 쌓여서 강을 이루고- 시체가 쌓여 둑을 이루어, 지금의 딸들은 그 모든 희생의 둑을 딛고 교육을 받고 의견을 피력하며 원하는 걸 찾아 나설 수 있게 되었어.

집단무의식, 여자아이들이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본능적으로, 알게 모르게 깨닫는 투쟁의 감각. 다른 여자아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런 느낌이 있어. 모든 여자아이는 사실상 전사로 길러져 온 게 아닐까, 하는. 살아남아 자유로워지기 위한 투쟁의 감각이 지금 내 몸 속에, 내가 알지 못할 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

그러니까, 너희들이 보고 사랑하고 만지고 끌어안는 여자아이- 미소짓고 애교를 부리고 토라지고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만이 여자아이의 전부는 아닐 거야. 대부분의 남자아이는 과연, 아는 만큼 모르는 부분도 존재 가능한, 낯설지만 동등한 대상으로 여자아이를 대하고 있을까? 여신이나 인형이나 창녀나 혹은 미지의 공포 아닌, 진정 동등한 인간으로? 내가 궁금한 건 그거야. 서로가 서로에게 있을 미지의 부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린 서로에게 동등한 대상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