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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백

방백 5: 그 여유 말고 이 여유로 주세요


1.

아침에도 계속 코드 생각을 하며 학교를 가는데, 마지막 식사 후 23시간 동안 먹은 건 실론티 캔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심 먹으러 나가진 않을 테니 미리 요깃거리를 사 가야겠다, 싶어 학교 안 빵집에 들어섰다. 지난 한 달간 애타게 찾았지만 없었던 포테이토 피자빵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집어들었다. 아침에 갓 구워서 따끈한 빵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하루키가 풍로에 아지를 굽듯 온몸의 세포가 요동을 했다. 아, 오늘은 운이 좋을 것이야.

먹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허기를 채우는 먹을 것이 단순하고 보잘것없을수록 이유 모를 경외심을 갖게 된다. 이시가키 린의 시가 생각난다.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도 같이.


2.

좋은 사람들이 떠난다. 박사과정을 시작하러. 한 달에 한 번만 보는 사이였는데 어쩜 그렇게 정이 들었는지. 오늘은 우리 학교 투어를 했으니, 울산 공장 다녀온 다음은 다같이 모 학교 투어를 가기로 입을 모았다. 지지난 주에도 만나고 지난 주에도 만나고 요번 주에도 만나는데 지겨운 줄 모르겠다. 첫 3개월이 제일 힘들다는데 부디 모두들 잘 견뎌내기를.

죠스에서 같이 떡볶이를 먹으며 얘기했었다. 야, 우리 십 년 후에 SERI의 네임밸류를 능가하는 정부 컨설턴트를 차려보자. 나 행정, 너 정치, 그리고 넌 전공 행동경제학으로 바꾸고! 근데 언니, 도원결의라 치기엔 좀 초라하지 않아요? 괜찮아. 걔네가 주막에서 술 사마실 돈 있었으면 복숭아나무 밑을 찾았겠니.

진심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몇 안 되는 드문 사람들. 이제 사람이 아무리 그리워도 쉽게 마음을 주기는 싫다. 금세 실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작 그 정도밖에 볼 줄 몰랐던 자신의 안목에도 실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 유명 단편 가라사대 위로를 싼 값에 구하면 슬픔도 싸진다더라. 결국 우정도 마찬가지다.



3.

간밤의 일이었다. 종종 수다를 떠는 후배가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온에 떠 있었다. 일하느라 바빠서 오프를 걸어놓았는데, 조금 짬이 생겨서 말을 걸었다.

- 안 자고 뭐하냐.

- 어, 선배 오길 기다렸다고 하면 좀 이쁨받으려나(...)

- 내용에 따라 다르지 ㅋㅋ

- 랩에서 너무 고생할까봐, 수고했다고 한마디 해주고 자려고요.


이 녀석하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종종 조언을 하거나 글을 봐 주었다. 괜찮은 책이 있으면 빌려다 주었다. 가끔은 내 고민도 얘기하고 책도 빌려다 보았다. 좋은 녀석이라 생각하고 사이도 좋지만 딱히 뭔가 기대하진 않았다. 위로를 받거나 의지한다는 생각도 거의 않은 채 지내왔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생각지 않은 타이밍에 먼저 건네진 위로가 가슴 뭉클할 줄이야. 그러고 나서 그 녀석은 금방 자러 갔다.


4.

일이나 책에 매달리다 보면 외롭고 괴롭고 수고로운 나날이 약간이나마 누그러진다. 때문에 더 애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활의 모서리에 부딪칠 때마다 일로만 버티는 건 한계가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람 전반에 대해 실망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곁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5.

비가 많이 온다. 그 속에서 마음을 전부 닫아걸고 오직 실적만을 좇아 영혼이라도 팔 기세의 내 모습을 본다. 아마 어제의 몰입이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간밤 폭풍의 눈 속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유펜에 다니던 시절, 가로 40센치에 세로 2.2미터의 목탄화를 제출했던 아침이 생각났다. 불평도 않은 채 몇 시간이고 노튼 선집을 읽어내려가던 재작년 가을 밤이 생각났다. 소리건 잡념이건 들려오지 않는 세상에서 오직 몰입의 몰입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는, 일이 행복하다는 건 바로 그런 걸 두고 이름이 아닐까.

이유는 따로 있다. 백석과 김수영을 밤새워 읽은 적 있는, 같은 만화를 돌려 보고 낄낄 웃는, 센과 폴라니를 같은 맥락에서 묶어 봐도 되겠냐는 나의 초보적 질문에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너, 스땐 못 와도 배신, 안 와도 배신이다. 내 옆동네로 와라. 약속한 거다."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어서. 결국은 사람 때문이다. 사람 때문에 실적도 좇고 영혼도 판다. 일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사람을 위해 일을 하는 것과 일을 위해 일을 하는 건, 같지만 또한 다르지 않은가.

6.

약간의 체념, 다른 말로 하면 여유, 를 가질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냉정하게 따져 지금의 난 철학을 전공한 철학박사는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문학을 전공한 문학박사도 될 수 없다. 단지 가능성만을 찾아 떠다닌다면 지금의 내가 삼 년 전의 그 학부생과 다를 게 무언가. 손에 모은 자갈을 던져버리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광맥을 캐는 건 요원한 일이다. 부끄럽고 홀가분하며 저릿한 마음의 외피를 가다듬어,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는 선생님 다음으로 이 분야에서 제일가는 선배가 되어 보자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러니 인문학의 기초를 바닥부터 완벽하게 다지겠다는 꿈은 이제, 본래의 날개를 펴 카스탈리아의 샘이나 혹은 은빛 아치 너머의 원류를 찾아 날아가라고 살짝 놓아 둔 채. 안녕.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그저 어깨 위 이십 센치쯤에서 떠다니도록 내버려둔 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