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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백

방백 8: 신앙을 가질 필요성



나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일체의 종교를 믿지 않는다. 프로그래밍을 끝낸 유전자처럼 복음은 이미 신의 손을 떠난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 역시 그걸 전파하는 '사람'들끼리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알지도 못하는 낯선 타인에게 오직 자신만의 정의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한, 더 많은 헌금과 보다 폭넓은 현실적 사교 관계를 유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종자'들을 관리하는 한, 문제의 집단엔 희망이 없다. 희망 없는 집단에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정신적인 낭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신앙을 가져보고자 생각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사람마다 결함이 있고 내게도 예외는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최근 자각하는 자신이 무섭다. 극단으로 치달을 때의 자신, 99명에게는 친절하더라도 기준에 어긋나는 한 명에게는 무섭도록 호전적으로 돌변하는 자신이 두렵다. 오직 죽이느냐 죽느냐만을 생각하며 자신이 입는 피해조차 비웃어 버리는 자신이 두렵다. 지금까지의 성과나 쌓아갈 실력에만 기대어 다른 가치,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휴브리스에 잠식당해 발전을 멈출까봐 두렵다. 쉽게 분노해서 저열해지거나 오만해져서 유연한 사고를 잃을까봐 두렵다. 모든 인간에게 결함이 있고 내게도 예외가 아니더라도, 단지 핑계를 대기 싫을 뿐이다. 자각조차 못하게 되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

그렇게 두려울 때 무엇에 의지하면 좋을까, 다른 사람들의 존재? 그들이 주는 조언? 사람은 사람에게 기대어 살지만 각자가 다르고 상황이 달라서, 서로의 결함과 한계 때문에 언제 어느 때건 굳건한 믿음의 대상은 될 수가 없다. 대개의 교주가 사이비인 건 그 때문이다. 그들도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며 단점투성이 개인에 불과하니까.

자기자신을 올바로 경계하기 위해 보다 큰 가치에 따를 필요(혹은 절박함)를 느낀다. 남신의주 박씨네 봉방에 든 백석처럼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들 때,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힘의 존재를 상기할 필요를 느낀다. 그 앞에서 나는 그저 약한 인간이며 약한 만큼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러한 감각을 신앙이라 부르는 게 아닐는지.

내면적 감각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외면적 의식ritual이 필요하다. 계획을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면 글로 적을 때보다 잘 굴러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며 성당에 나가고 교리문답을 외우는 걸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 제기한 문제가 남는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종교를 가지려 한다면 결국 종교의 교리 안에 머무는 사람들과 교류해야만 하는데, 한국의 현실에서라면 아까도 말했듯 대개의 경우 희망 없는 낭비에 불과하다. 절-대-싫-다, 내-가-왜.

아직도 기억난다. 어머니 대신 성당에 잠시 출석했을 때 체사레 보르자를 닮은 신부님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왜 여기에 왔느냐고. 대답은 정말 세 가지 뿐이었다: 사람 좀 사귀려고. 인생이 힘들어서. 남들이 좋다길래. 두 번째는 어느 정도 납득했지만 첫 번째와 세 번째 이유만으로 종교를 가지려는 케이스엔 허무함 이상의 환멸이 느껴졌다. 온 마음을 다해 교리가 제시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 존재가 자신에게 절박한 의미가 되기 때문에 뭔가를 믿으려는 태도는 적어도 그날의 말들 속엔 없었다. 내 차례가 와서 나도 단상에 나가 대답했다: 저 여기 어머니 대신에 출첵하러 왔습니다. 믿으러 온 것 아닙니다. 신부님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믿지 마세요. 웃음이 터졌다.
 


어떤 형태가 될지, 정말로 특정 종교 집단에 이름을 걸어두게 될지, 잘 믿어지지도 않는 교리라도 하나 골라 질근질근 씹어 볼지는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최소한 내가 나 자신으로 남지 못하게 하는 악덕들,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들에 방어하고 싶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인격신이 이 소망을 듣고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나는 신앙을 원한다. 방랑산의 할아버지처럼- 경계를 지켜라, 네게도 정해진 한계가 있다 - 언제 어느 때건 준엄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해 줄 뭔가를 원한다. 겸허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줄 뭔가를 원한다. 지금. 그러니,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