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그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다는 말을 들었다. 독한 에어컨 바람에 도시는 겹겹이 열기를 껴입고, 그럼 사람들은 더욱 독하게 에어컨의 희망온도를 올릴 테고, 악순환의 연속이다. 집에서는 선풍기도 거의 안 틀고 지내는데, 지하철이며 학원에 거듭 몸을 담그는 생활을 하다 보니 아직 7월 말에 불과한 지금도 벌써 코가 근질거린다. 더위가 온몸으로 스며들면 희한하게 몸이 아주 가벼워져, 식욕조차 사라지고, 머릿속은 7분 끓인 반숙 달걀처럼 흐뭇해진다. 한국의 여름이 계절의 주민들에게 선사하는 작은 마법이다. 정작 그 주민들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지만.
다음달부터 바로 실전반을 들어가도 좋다는 코멘트가 씌어진 첨삭 뭉치를 가방에 쑤셔넣고 코를 훌쩍이며 나오니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다. 술이 고파서 아는 이에게 네댓 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또각또각 샌들의 울림이 경쾌한데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 몇 번 포도를 맴돌다 고개를 드니 정류장 너머로 햇살이 엷은 분홍빛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대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사탕처럼 명랑한 녹색 버스가 거리를 뚫고 달려와, 재빨리 잡아탔다.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으러, 가자고 생각했다.
바알간 덩어리 같은 빛을 왼편에 끼고 달리는 버스 안은 한산했다. 뒷전에서 여자애 둘이 끊임없이 노래를 따라하며 재잘거렸다. 종종 육두문자를 섞고, 깔깔거리기도 하며, 어눌하고 되바라진 목소리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야, 라고 혼자 생각했다. 바람이 시원해서 이대로 아주 멀리까지 가 버리고 싶었다. 압구정을 거쳐 신사를 지나 강남 교보타워 앞에 내려주지 않는대도 성심을 다해 기꺼이 용서하리라고. 푸른 가로수의 이파리가 점점이 저무는 하늘에 박혀 깃털 같은 백색으로 반짝였다.
책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걸 보자 갑자기 한국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꼭 어릴 적에 못 먹던 굴 든 김치나 마늘처럼, 시간이 흘러도 옛 기억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던 무엇이 절실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봄학기 시험 기간에 창밖을 내다보면서 경희대로 벛꽃놀이 가지 못함을 매번 아쉬워하다, 졸업을 꼭 일 년 남겨둔 뒤숭숭한 4월 말에 이르러 문득 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북받치는 감정과도 비슷하겠다. 혹은 좀 다르려나.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벛꽃은 굳이 손 내밀어 잡아보려 할 만큼 쓸쓸한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 서점에 들어설 무렵의 코도 마음도, 모두 자포자기 상태였나 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마지막으로 사랑을 해봤다고 믿었던 게 언제였을까. 사랑은 자기확대란다. 사랑하는 타인으로 인해 한없이 넓어지는 자신을 느끼고, 헤어짐으로써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다. 천 송이 꽃 중의 한 송이 꽃이 스스로 하여금 천 송이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고, 구백 구십 구 송이의 수많은 꽃송이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또 깨닫는 것이란다. 그래서, 그래서, 자신을 모르면, 자기 정체성을 모르면 사랑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단다. 그때 그 말을 그렇게 쉽게 입에 담던 너는 대체 누구였을까. 빵처럼 보드라운 문장이 목에 탁 막혀 더는 넘어가지 않아, 울 수조차 없는 지금의 너는 또 누구일까. 사랑이라니, 어떻게.
수없이 많은 못을 전부 장도리로 뽑고 나면 그 자리엔 무엇이 남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어렴풋이나마. 뽑고 나면 그림조차 걸 수 없는 흔적들. 매일 밤 한 줄씩 꼭꼭 눌러 쓴 문장들. 아룬다티 로이는 매일 한 줄씩을 썼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몇 순이 돌고, 몇 년이 흘러 문장들은 '작은 것들의 신' 이라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의 치약 냄새와, 무지갯빛의 물고기처럼, 아찔했던 혹은 아팠던 순간을 고작 한 줄로 적어 머리맡에 놓고서는 우리는 다시 알 수 없는 세월을 잠들러 간다. 집어삼키듯이 문체만 혹은 색채만 들여다보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어쩐지 눈물이 넘쳐 올랐다. 단지 영어 아닌, 번역투 아닌,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인과일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은 모국어에 굶주렸던 것일까.
머릿속에 담아 둔 말은 실로 상처받기 쉬워, 아주 작은 자극에도 파르르 떨며 반응한다. 문장이 폭발적으로 넘쳐흘러 머리가 아파 왔다. 읽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거리로 뛰어나갔다.
날빛이 썰물처럼 물러간 도시의 박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혼자 여행에 제법 길이 들 무렵, 어두워지면 칼같이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육중한 건물과 한없이 이어지는 포도가, 텅 빈 거리 위에 그림자와 더불어 쏟아져 내리는 그 무게를 차마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외롭다, 혹은 고독하다는 짧은 말로 총총히 읊고 넘기기에 밤의 도시는 언제나 그 이상의 낯섬으로 여행자를 짓누른다. 혼자서는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저마다의 중력으로 도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나와 닮은 눈빛과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며. 달려가자 샌들의 경쾌한 반향이 들려왔다. 한남대교 맞은편으로 무수한 간판의 불빛이 세로로 열지어 사라지고, 버스가 밤의 신사처럼 말쑥한 차림으로 그 한복판을 스쳐갔다.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름다웠다.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도미노가 쓰러지듯 단어와 형태소가 명멸하고, 나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마, 무언가가 부족했던가 보다. 어디에선가 나사 몇 개를 떨구고 왔나 봐. 필라델피아 언저리일까 아니면 우리 아파트 뒤편 담벼락 아래일까.
나는, 그저 당신이 필요했어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당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잃어버린 작은 조각을 하나 더 찾아 조금은 더 둥글게 변한 것 같은 마음을 가슴에 담고.
아주 오랜만에, 단 한 호흡에 써내려갈 수 있었다. 고마워.